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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북한이 인정한 美 최고위 친북동포 이준무는 누구?우륵교향악단 지휘자 이준무, 유명음악 사이에 북한 정권 찬양곡 삽입해 관객 우롱하기 일쑤 
임종규 뉴스메이커 선임기자 | 승인 2019.11.16 03:39

윤이상, 뉴욕 통일음악회 지휘자로
친북음악인 이준무 대신 심경흠 선택

북한이 인정한 미국 최고위 친북한 동포 이준무 우륵 교향악단장 겸 상임지휘자(뉴저지 거주). 그는 미주 최대의 친북한 단체인 재미동포전국연합의 실질적 리더이기도 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북한이 인정하는 최고의 해외동포 음악인은 윤이상 (1917년 9월 17일~1995년 11월 3일)이었다. 그는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한국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 겸 현대 음악 작곡가였다. 그는 음악에 대해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있었다.

1956년부터 유럽에 거주한 윤이상은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유럽 음악계는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윤이상은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친북을 넘어 종북주의자였다. 심지어는 간첩이란 말까지 있었다. 윤이상은 1963년 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김형욱이 부장으로 있던 중앙정보부는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김일성(가운데)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윤이상(왼쪽), 이수자 부부.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 이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유럽 유명 음악인들의 탄원 덕분에 재심·삼심에서 감형 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환멸을 느낀 그는 1971년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다. 한국정부는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입국을 불허했다. 한국정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윤이상의 잘 못도 크다. 그가 서독으로 귀화한 후 본격적으로 북한을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1985년에는 오길남(1942년생·경제학자)씨 가족을 북한으로 유인하여 그들이 북한에 억류되게 하는 등 윤이상은 북한을 위한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정부가 이적단체로 규정한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초기 해외지부 의장도 역임했었다.

그런 활동 때문에 현재 북한에는 윤이상관현악단이 존재하고 있으며 윤이상음악연구소도 설립돼 있다. 또한 매년 북한정권은 윤이상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런 윤이상에게도 꿈이 하나 있었다. 세계의 중심지 뉴욕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음악회를 개최하고 싶어 했다. 실제로 그는 1995년 1월 13일과 15일 이틀간 뉴욕에서 통일음악회를 개최하고자 동분서주했다.

윤이상의 생전 꿈은 세계 중심지 뉴욕에서 자신의 음악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뉴욕과 독일을 몇 차례 왕래하기 까지 했다. 뉴욕의 친북동포들이 그의 협조자였다.
맨해튼 링컨센터에서 그의 공연을 하기위해 모든 계획이 잘 짜여졌다.

친북동포들은 준비위원회 사무실까지 마련하고 음악회 기금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링컨센터에 계약금 8천 달러도 지불했다. 북한에서는 보조지휘자를 포함 6명의 윤이상음악연구소 소속 연주자가 음악회에 동참하기로 했다.

당시는 1991년 9월 17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이후여서 한반도에 해빙무드가 조성 될 시기였다.
‘윤이상 음악회’가 뉴욕에서 착착 준비되고 있었지만 윤이상 배후에서는 음모의 싹이 피어나고 있었다.

당시 뉴욕한인 음악계에는 활동을 열심히 하는 정상급 음악인이 2명 있었다.
한 사람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이준무(현재 75세)였고 또 다른 사람은 연세대 음대를 나온 심경흠(1939년생·작고)이었다.

전북 정읍이 고향인 이준무는 전주남중학교와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남원에서 초등학교 교원으로  4년간 근무하다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진학, 바이올린을 전공한 후 국립교향악단을 거쳤다. 

1972년 1월 미국으로 이민 와 1981년 서울대학교동창회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이후 오케스트라는 '서울 심포니 오케스트라 오브 뉴욕(서울교향악단)'으로 개칭했다가 2000년 '우륵 심포니(Ureuk Symphony) 오케스트라(우륵교향악단)'로 이름을 바꾸었다.

살아 생전의 심경흠 씨. 그는 뉴욕 윤이상 음악회 취소와 관련한 큰 피해자였다.

한편 심경흠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도미, 몬클레어 뉴저지 주립대학 대학원과 예슈아대학 대학원을 나왔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가 계명대학교 음대 교수를 하다 뉴욕에 다시 와 뉴욕한인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등으로 왕성한 연주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한인 1세대 음악인 중에는 뉴욕동포사회에 제일 잘 알려졌던 인물이었다.

주변에서 음악회 지휘자로 이준무, 심경흠을 추천했지만 윤이상은 별다른 고민 없이 심경흠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이준무의 음악실력에 대해선 심경흠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다.

이 같은 결정과 평가는 이준무에게도 전해졌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인 음악가 A 씨는 “이준무는 친북 음악인이었고, 심경흠은 그렇지 않았다”면서 “당시 윤이상은 이념을 떠나 순수 음악실력으로 심경흠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A 씨는 “윤이상의 이러한 결정은 이준무를 비롯한 친북한 동포들의 반발을 샀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결국 이점이 음악회 개최가 취소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고 전했다.

윤이상 뉴욕음악회 거짓투서로인해 취소 ... 
몸 상태 안 좋았던尹, 화병(火病)으로 사망

심경흠은 자신이 국제적 이슈가 될 통일음악회에 지휘자로 선정되자 윤이상의 음악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윤이상에게 이런 말을 한다.

“윤 선생님의 심오한 곡들을 저 혼자 모두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보조 지휘자가 필요합니다” 이 같은 심경흠의 제안에 윤이상은 평양에다 연락해 공연 중간에 심경흠 대신 지휘 할 보조지휘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각 파트별로 협연 할 북한 연주자 3-4명도 함께 뉴욕을 방문 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러고 있는 사이 북한 당국에는 “심경흠과 이번 음악회를 준비 책임자인 친북한 동포 K는 남한 국가안전기획부의 자금을 받는 앞잡이들”이란 투서가 수차례 전달됐다.

친북동포 B 씨는 “당시 투서 작성에는 이준무도 간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투서들은 캐나다에 거주하던 북미주 최고위급 친북인사였던 전충림에게 전달됐고 그에 의해서 평양에 보내졌다”고 밝혔다.

북미주 한인사회 최고위 친북한 인사였던 故 전충림 씨. 그의 죽음 역시 윤이상 음악회 취소 관련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충림은 북한이 유엔에 가입하기 이전까지는 ‘비공식 북한대사’라고 불리던 거물급 친북한 인사였다. 그가 북미주지역의 총책임자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미국과 캐나다에 유신독재에 반대해 조국을 등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전충림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일보 업무국장출신으로 73년부터 토론토에서 반정부교포신문을 운영했다.

그는 1979년 함북 여흥에 친누나와 북의 친척들을 방문하고 온 뒤부터 친북한 사상으로 변했다. 그후 전충림은 자신이 운영하던 반정부성향신문을 아예 친북 성향지로 바꾼 후 본격적인 대북 창구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북한도 그의 이 같은 점을 인정, 미국과 캐나다에서 비공식 북한대사 활동을 하게 허용했다. 뉴욕에서 보낸 투서들은 김정일의 손에까지 들어갔다.

부하들의 투서에 근거한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격노하며 음악회 취소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는 윤이상에 대한 김정일의 오해도 한몫했다.

북한 김일성이 1994년 7월 4일을 사망했다. 당초 북한 당국은 7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10일장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여기에다 사흘을 더해 13일장을 치르라고 지시했다.
결국 김일성의 장례기간은 7월 8일부터 20일까지였다.

하지만 윤이상은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장례기간 동안 평양을 방문 할 수 없었다.장례기간이 끝 난지 몇 달 후에야 윤이상은 평양을 찾을 수가 있었다.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 윤이상은 혈압은 높이 오르고 온 몸은 부어 있었다.
이런 윤이상에게 김정일의 힐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당신은 수령님 살아생전에 그렇게 도움을 많이 받아 놓고는 수령님 장례기간 동안에 찾아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괘씸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미국의 우리 쪽 동포들이 당신을 안기부 앞잡이라고 하는 투서들을 보내 왔다. 뉴욕 음악회 때려치워라”

김정일의 이 말에 윤이상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안기부 앞잡이란 말에다 평생의 꿈이었던 뉴욕에서의 공연이 물거품 됐다는 사실을 윤이상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심한 충격을 받은 윤이상은 북한을 떠나 도쿄에 도착한 후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북한과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윤이상과 북한과의 관계는 이렇게 끝났다.

가뜩이나 몸 상태가 안 좋은 윤이상에게 화병(火病)까지 더해졌다. 94년 12월 윤이상은 도쿄에서 폐렴으로 입원했다. 6주일을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몸 상태는 나아질 기미를 안 보였다. 

안기부 앞잡이라는 낙인과 뉴욕음악회 취소에 대한 충격은 그만큼 컸다. 1995년 2월에서야 베를린에 돌아간 윤이상은 이미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결국 그는 북한에서 김정일에게 안기부 앞잡이, 뉴욕음악회 취소란 말을 들은 지 1년만인95년 11월 베를린 발트 병원에서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표면적인 사망원인은 폐렴이었다.

윤이상 뉴욕음악회 취소는
심경흠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맨해튼 링컨센터에서 열리기로 했던 윤이상 음악회의 취소는 심경흠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심경흠도 이 음악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북한에 의해 안기부 앞잡이로 낙인 찍혔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은 이념을 떠난 순수하게 윤이상 음악을 접했을 뿐인데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 심경흠은 이때부터 폭음의 정도가 심해졌다. 결국 그는 1997년께부터 당뇨와 중풍으로 고생하다 근육무력증과 실어증까지 얻게 됐다.

또한 심경흠은 시력까지 잃게 되면서 음악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전립선 암 진단까지 받았다. 그의 말년은 너무 불행하고 쓸쓸했다.

2011년 6월 1일 심경흠은 뉴저지 한국요양원에서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잘 아는 동포 박모 씨는 “윤이상 음악회 취소 이후부터 심경흠은 건강을 돌보지 않고 막 살기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그만큼 그는 음악회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고 말했다.

윤이상 음악회 취소는 후폭풍이 컸다.
윤이상이 북한과의 단절을 선언하자 북한 당국자들은 음악회 취소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자들은 평양을 방문한 친북한 동포들에게 “당시에는 우리가 너무 경솔했다”며 “투서만 너무 믿고 성급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당국은 이에 대한 책임을 캐나다의 전충림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런 엉터리 투서를 내용도 거르지 않은 채 평양에 올린 잘 못이 크다. 그로인해 뉴욕에서 열리기로 했던 통일음악회도 열리지 못했고 윤이상 선생도 우리와 관계를 끊었다. 당신은 장군님께 허위정보를 올렸다. 모든 것이 당신 책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북한은 전충림을 멀리했다.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은 72세의 전충림은 시름시름 앓다가 95년 4월 17일 사망했다. 윤이상이 죽기 7개월 전이었다.
북한에 충성을 다한 전충림의 죽음은 허망했다.

2017년 4월 13일 평양에서 열린 제30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서 이준무 등 단원들이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이준무는 이 행사에 매년 참가해 북한 악단의 지휘를 맡고 있다.

북한 정권, 이준무의 30년 넘는
꾸준한 친북 및 음악활동 인정

윤이상과 전충림이 세상을 뜨고 나자 북한은 해외동포 음악계의 새로운 책임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봤지만 이준무 밖에 없었다.

북한은 30년 넘게 꾸준히 친북활동과 음악활동을 하는 이준무를 윤이상 대체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윤이상 보다는 거물급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북한이 인정하는 최고위 해외 음악인은  이준무 뿐이다.

뉴저지 티넥에 거주하는 이준무(미국명 크리스토퍼 리)는 현재 우륵 심포니 오케스트라 운영자 겸 상임지휘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우륵 오케스트라에는 수 십 명의 단원이 속해있다. 

강모, 이모, 홍모, 김모 등의 한인단원들도 눈에 띤다. 물론 이들은 돈을 받고 공연하는 연주자들이다. 
친북성향인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평양에서 공연하고 있는 이준무의 모습.

우륵 오케스트라는 공연 때마다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등 유명 음악가의 곡(曲)과 곡 사이에 북한 음악을 삽입해 들려준다. 거의 모든 음악회에서 우륵 오케스트라는 김정은을 찬양하는 ‘발걸음’을 비롯 ‘우리의 맹세’,  ‘승리의 행진’, ‘나의 조국’, ‘초소에 수령님 오셨네’ 등 북한 음악들을 연주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우륵은 지난 10년 동안 1년에 서너 차례씩 뉴욕에서 공연을 갖고 있다. 
2019년 11월 현재 122차례 공연을 개최했다.

우륵의 활동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음악인들은 적지 않다.  
동포 음악인들은 “공연장 대관료와 수십명 단원들에 대한 공연비 지급 등이 큰 금액일 텐데 그것이 어떻게 충당되는지 무척 궁금하다”며 “30∼50 달러짜리 공연 티켓만 팔아서는 가능 할 것 같지는 않다”고 입을 모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한이 그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뉴욕의 친북한 동포들이 그를 도와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김정은을 찬양하는 노래 '발걸음'을 부르고 있는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이준무의 우륵 오케스트라는 이들이 부르는 노래 등을 뉴욕에서 매년 연주하고 있다.

그동안 우륵은 특히 2월 16일 김정일 생일(광명성절)과 4월 15일 김일성 생일(태양절) 무렵에는 반드시 기념음악회를 개최해 왔다.
이준무의 이런 꾸준함은 북한이 그를 최고의 해외음악인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이준무는 태양절을 기념하기 위해 평양에서 개최되고 있는 음악제인 <사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96년부터 매년 초청되어 조선국립교향악단, 평양교향악단, 윤이상 관현악단 등을 지휘 하고 있다.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 온 친북동포 B 씨는 “북한당국자들이 이준무를 지칭하며 우리 공화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해외동포 음악인이라고 치켜세웠다”며 “북한에서 이준무의 위상이 대단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친북동포 C 씨는 “그가 북한을 1년에 한 두 차례 방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평양에 도착하면 이준무는 순안공항에서 세관검사도 받지 않을 정도”라고 전했다.

2017년 9월 뉴욕을 방문한 북한 외무상 리용호.

이준무가 북한에서 인정하는 거물급 음악인이란 사실은 2016년과 2017년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북한 리용호 외무상의 행보로 더욱 확실해 졌다.

리용호는 흔히 있을 법만 친북한 간담회나 리셉션도 갖지 않았지만 이준무의 음악회만은 참석했다. 특히 2017년은 그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강한 비난을 쏟아낸 직후였다.

당시 우륵의 공연이 열린 맨해튼 머킨(Merkin) 콘서트홀은 총 4백49석. 이중 1백여 석이 2층에 위치해 있다. 우륵 측은 리용호 일행을 위해 일반인 관객들의 2층 출입을 막았다.

이 공연을 취재한 월스트리트저널 기자는 이준무에게 북한을 지원하는 음악공연에 관한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정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이준무는 “나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상관없다”면서 “다만 통일한국을 원할 뿐”이라고 말했다. 당시 이준무의 블로그와 페이스북에는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글이 올라와 있다.

리용호는 2018년 9월에도 뉴욕을 방문하고 이준무가 실질적 리더로 있는 친북단체 재미동포전국연합회(KANC) 관계자들과 친목모임을 가졌다.  이준무는 이 단체에서 문화예술분과위원장 겸 동부지역 연합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리용호는 9월 30일 맨해튼의 고급 중국식당에서 30여명의 친북동포가 참석한 모임에서 북한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당부했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는 표면적으로는 '대북 교류를 위한 비영리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1997년 설립 당시부터 북한 당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것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친북단체이다. 이 단체는 현재 회장 선출문제로 내분을 겪고 있어 이준무가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리용호는 미국 측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차량에서 내려 식당에 들어서면서 활짝 웃는 얼굴로 이준무 등 단체 간부들과 인사했다. 식당 내부 포스터에는 '온 겨레가 민족 자주의 기치 아래 부강번영 통일강국 일떠 세우자!'는 북한식 구호가 적혀 있었다.
리용호는 이날 모임에서 참석자들을 향해 "북한은 비핵화를 향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은 이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며 대북 제재 해제를 호소했다.

이준무를 비롯한 우륵교향악단 단원들이이 지난 10월 5일 연주회를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우륵교향악단은 2018년에만 남북미 3국 간 대화 분위기로 인해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곡을 제외 했지만 매년 변함없이 친북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우륵교향악단은 2019년 10월 5일 오후 8시 맨해튼 머킨 콘서트홀에서 10.4 남북공동선언 12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122회 공연을 열었다.  

우륵 측은 이번 공연에서 모차르트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고 홍보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오프닝 곡부터 북한 체제 찬양가인 '인민의 환희(People's Joy)'를 교향곡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그러나 참석한 미국인 관객들은 무슨 곡인지도 모른채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우륵악단의 연주는 늘 북한을 찬양하는 곡이 유명 곡들 사이에 끼어 있는데다 가사도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음악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른 채 연주만 듣고 박수를 치고 있다.  

이날 2부 공연 시작곡 역시 대표적 김정일 찬양가 중 한 곡인 '나는 영원히 그대의 아들(I will always be your son)'를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이외에도 이 악단은 모차르트 교향곡 등 기존 클래식 음악과 더불어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인민의 환희’,  ‘인민이 사랑하는 우리 령도자’ 등을 연주했다.  

'꼼수 음악회' 비난 받는 이준무, "자유란  
북한주민들 각자가 판단하는 것" 궤변 

이로 인해 "이준무의 음악회는 항상 관객들을 우롱하고 있다"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예전에도 우륵 측은 차이콥스키 등 고전음악만 연주한다고 홍보해 표를 팔았지만, 막상 연주회에선 교향곡 모음이란 이름으로 북한 선전음악 3곡을 연주했다. 이준무는 늘상 이런 식이다.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김성 유엔주재 북한대사(왼쪽에서 두 번째)가 10월 5일 우륵교향악단 공연 관람 후 친북 인사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과거 친북주의자였지만 지금은 친북활동을 중단한 H 씨는 “이준무는 더 이상의 꼼수를 그만 부리고 차라리 노골적으로 북한음악회를 개최하라”면서 “차라리 그것이 더 북한에 충성하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이어 H 씨는 “나이가 75세나 되는 이준무가 무엇이 두려워 매번 꼼수를 부리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어차피 그는 친북을 넘어 종북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한미정보기관이 그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뉴욕에 본부를 둔 민간단체 인권재단(HRF) 역시 우륵교향악단의 음악회를 강하게 비난했다. 10월 4일 인권재단은 이 음악회에 대해  “터무니없는 홍보 사기”라며 “음악회가 김정은 정권과 체제를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소르 핼버슨 인권재단 회장은 성명에서 “북한은 세계 최악의 압제국이라며, 미국의 심장부에서 독재자 찬양곡을 연주하는 것은 옛 독일의 나치 행진곡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 단체의 알렉스 글래드스타인 전략기획실장은 “북한 당국은 그들의 영도자를 찬양하는 음악회가 세계의 중심 뉴욕에서 열렸다고 북한 주민들에게 선전하며 이를 위대한 승리로 포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글래드스타인 실장은 “친북 성향의 이 악단이 지금까지 모차르트와 멘델스존 같은 음악회를 여는 것처럼 위장한 뒤 실제로는 김정은과 그의 폭정을 찬양하는 곡을  유명곡들 사이에 연주해 왔다”고 지적했다. 또 글래드스타인 실장은 이런 음악회를 주최하는 사람들을 ‘악의 공범’에 비유하며 음악회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0월 5일 음악회에는 2018년에 이어 김성 유엔주재 북한대사와 중국 외교관들이 참석했다. 김 대사는 1층 좌석 네 번째 줄 정 중앙에 자리해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을 관람했다. 한편 이 악단은  판문점 선언 1주년을 앞둔 지난 4월 13일에는  ‘꽃피는 4월의 봄’이라는 주제로 태양절 기념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비난 여론에 대해 이준무는 뭐라고 반박을 할까.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70년이나 미국의 파워에서 짓눌려 살았는데 이제 우리 민족끼리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우리 소리를  조금 내는 것 같고 뭐 그렇게 신경을 쓰나?  외세가 없는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끼리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뉴욕은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멜팅팟(melting pot)이라고 한다. (우리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어울려서 사는 것이 좀 어떤가?”

또한 그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북한 주민들이) 자유가 있는가 없는가는  주민 들 각자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놨다.

이준무에게 있어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의 2014년 최종보고서 내용은 관심 밖의 일일 뿐이다. COI는 당시 보고서를 통해 “북한에는 사상‧양심‧종교의 자유는 물론이고 언론‧표현‧정보‧결사의 자유도 완전히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준무의 최근 모습.

이준무는 어쩌다 이처럼 열렬한 친북주의자가 됐을까.
이준무를 잘 아는 동포 K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이민 초창기의 이준무는 별다른 친북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이념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전 롱아일랜드한인교회(2010년 3월 폐쇄)의 담임이었던 안중식 목사인 것 같다. 이준무가 이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있으면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안 목사와 의기투합 한 것으로 보인다. 1971년 창립한 롱아일랜드한인교회(뉴욕주 포트 워싱턴 소재)는 1980년대만 해도 소위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의 중심지였다. 지난 2006년 교회를 사임한 안중식 목사는 지난 2009년 7월 세상을 떠난 박성모 목사와 함께 해외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 교회는 한때 한완상 전 총리와 서경석 목사, 김민웅 목사 등이 거쳐 가기도 했다. 자유우파정부에 대한 반정부가 발전하면 친북한이 되기도 한다. 아마 이준무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친북활동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념은 무서운 것이다”

임종규 뉴스메이커 선임기자  chunjiin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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