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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공개 1탄> 순대 사업으로 성공한 北 국가안전보위부 출신 마영애 씨 “정보요원 당시 내 이름은 최광애와 장혜숙 였다”  
뉴욕 <뉴스메이커> 임종규 선임기자 | 승인 2021.01.13 14:49

북한 인권운동가 마영애 씨의 
호사다마(好事多魔)

“겸손 해야죠.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20년은 ‘마영애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는 모든 것이 술술 풀렸다.

북한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며 순대사업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마영애 씨.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고통을 받았지만 그의 사업만큼은 승승장구(乘勝長驅) 했다. 새로운 지점을 3개나 더 신설하며 한인사회에 ‘마영애 평양순대’를 폭 넓게 알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코로나 와중에 대박을 친 것이다.

또한 미국정부와 뉴저지주 의회 등에서는 그에게 인권상, 사회봉사상 등 굵직한 상(賞)을 안겨줬다.
그러나 마 씨는 이러한 사실을 가능한 주위에 알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언론 인터뷰도 정중하게 사양했다. 남들은 고통 받는데 나 혼자 잘 되는 모습을 주변에 알리기 싫은 까닭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이런 마 씨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조선족 출신여성 조모(34)씨와 탈북자출신 남성 방모(52)씨.
일정한 직업도 없이 한 집에 사는 그들은 마 씨를 살해협박 등 6가지 혐의로 메릴랜드주 몽고메리카운티 법원에 형사고소를 했다가 작년 1월, 기각 당했다. 법원은 이들의 고소를 아무런 증거 없이 행한 무고(誣告)행위로 판단했다.

그러자 이들은 마 씨를 상대로 돈을 요구하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현재 2차 청문회(Hearing)까지 마친 상태이며 조만간 3차 청문회가 열릴 예정이다.

마 씨측 변호인은 “이 소송도 기각될 전망”이라면서 “이들이 행한 형사, 민사소송은 결국 돈을 목적으로 한 사기행각”이라고 밝혔다.

마 씨가 이들에 대해 맞고소를 하지 않는 이유는 한 때 이들이 자신에게 “선생님”, “누님”이라 부르며 따랐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옛정 때문이란다.

“주변에서는 이들에 대한 형사, 민사소송(맞고소)을 권하고 있지만 고민이 많습니다. 변호사와 좀 더 상의해 본 후 결정하겠습니다.
예전에 나와 도움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던 사람들인데...

모두가 내 사업이 잘 되니까 벌어진 일이죠. 내가 예전처럼 (그들과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면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문제는 이들이 페이스북, 단톡방(카카오톡), 유튜브 등에 마구잡이로 허위내용을 올리며 1년 넘게 마 씨를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허위 주장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이들의 목적은 가짜뉴스를 유포함으로 해서 마 씨의 사업에 타격을 입히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이들은 지난 12월, 워싱턴(버지니아)에서 발행되는 두 곳의 한인 일간지에 <마영애 사기피해자 탈북민 비상대책위>라는 유령단체 이름으로 허위광고를 게재하고 마영애 씨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22개 미주 한인단체,조 씨와 방 씨를 FBI 등
미국수사기관에 고발

이에 대해 (뉴욕)정의사회실천시민연합의 크리스 강 사무국장은 “조 씨와 방 씨는 이미 22개 한인단체 이름으로 연방수사국(FBI), 이민국, 국토안보부, 연방검찰, 국세청 등 미국정부 각 기관에 수차례 고발 된 인물”이라고 밝혔다. 

강 국장은 “조 씨의 혐의는 위장결혼 브로커, 사기, 공금횡령 등이며 방 씨는 허위 망명신청, 간첩행위, 위장결혼, 사기 등의 혐의로 고발됐다”면서 “특히 방 씨는 한국 국정원과 경찰에도 고발을 당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강 국장은 “한국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불법체류자인 방 씨는 한국 귀국 즉시 체포돼 조사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 시민권자인 조 씨에 대해서는 현재 FBI 등이 수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의 고발에 동참한 한인 단체장 A 씨는 “22개 고발단체 말고도 이들의 범죄행위를 알고 있는 미국 거주 탈북동포 4명이 각기 다른 고발장을 미국 수사기관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A 씨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확인도 않고 마영애 씨를 비난하는 광고를 게재한 워싱턴 한인일간지들은 각성해야 한다”며 “조모, 방모 씨와 더불어 이들 언론사를 상대로도 명예훼손에 따른 소송이 진행돼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단체장 B 씨는 “후원금 횡령, 위장결혼 브로커, 사기 등의 불법행위를 벌인 두 사람이 최근 자금 조달이 어렵게 되자 유명 인권운동가 마영애 씨를 ‘배후 인물’로 삼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B 씨는 “당초 한인단체들의 고발은 이들에게 피해를 당한 미국거주 탈북자들의 요청으로 시작됐다”며 “그럼에도 이들이 모든 화살을 마영애 씨에게 돌리는 이유는 ▲ 마 씨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취할 목적과 ▲ 유명인으로 부터 탈북자들이 핍박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함”이라고 덧붙였다.

B 씨는 “탈북자들의 문제를 남한출신 이민자들로 구성된 한인사회에 끌어들여 일을 더 키운 조 씨와 방 씨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면서 “마치 윤석열을 대권후보로 키워 준 문재인과 추미애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고 전했다.

전직 北 정보요원 마영애 씨가
처음으로 털어 놓는 이야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좀처럼 드러내기 싫어했던 마영애 씨는 최근의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본지의 인터뷰 요청을 고심 끝에 응했다.

그는 “이제는 나에 대한 바른 정보를 세상에 제대로 알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마영애 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12월, 그의 뉴저지 자택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마 씨는 아직도 미국 정부에 의해 신변보호를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가 거주하는 타운(Town)의 이름을 지면에 옮기지 않겠다.

다음은 마영애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 마영애 씨는 북한인권운동가로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지만 당신의 과거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번 기회에 솔직히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나?

“내가 한국 국정원에서 3개월간 조사 받을 때 진술한 내용을 그대로 말하겠다. 세상에 처음으로 하는 말이다.

내 아버지 이름은 마상렬 씨이며 평양이 고향이다. 어머니 이름은 국봉례 씨이고 충남 논산 태생이다.

두 사람은 1945년 해방 직후 평양에서 결혼해 1남 3녀를 낳았다. 큰언니는 나의 탈북이후 국가안전보위부(한국의 국정원에 해당)의 감시와 핍박을 받다가 2008년 사망했다. 둘째 언니는 현재 함경남도에 거주하고 있다.
셋째인 오빠는 1951년생인데 열차사고로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막내인 넷째이다”

- 당신을 화교(華僑)로 잘 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던데?

“아버지는 평양에서 의학공부를 한 한의사였다. 한의학으로 이름을 날리던 아버지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자주 의술활동을 펼쳤다.

해방 전에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초청으로 중국에 가서 김형직과 측근에게 의술을 가르쳤을 정도였다. 해방 후에도 북한정권에서 인정받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중국출장이 잦았다.

나는 부모님의 출장길인 19XX년 X월 X일(편집자 주 :마 씨가 정확한 생년월일을 기자에게 밝혔으나 본지는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중국 흑룡강성에서 태어났다.
내가 화교였다면 어떻게 북한군에 입대 할 수 있었겠나? 화교는 북한군에 입대 할 자격이 없다”

- 인정받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평양에서 거주했나?

“아니다. 어머니의 출신이 남한이기 때문에 평양에 거주 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외삼촌이 서북청년단(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우익 반공주의 청년단체)출신으로 북한을 왕래하던 공작원이었기 때문에 난 출신성분이 매우 안 좋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대학도 못 갔다. 군대 가기 전까지 난 함경남도 단천에서 거주했다. 단천중학교(한국의 고등학교)가 북한에서의 최종학력이다”

북한에서 아코디언과 양금연주자로 영재교육을 받은 마영애 씨가 평양예술단 공연을 하고 있는 모습.

- 학교 졸업 후 군대를 간 것 같은데 군대 생활은 어땠나?

“군대생활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됐다.
나는 비록 출신성분이 안 좋았지만 젊었을 때는 예쁘다고 소문났던 사람이다(웃음).

거기다가 국악기 양금(洋琴)과 서양악기 아코디언(Accordion)으로 영재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랬으니 당연히 예술분야로 풀렸지 않았겠나?

평양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531군부대 선전대>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꿈에 그리던 평양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곳에서 군인들을 위문하러 다니며 수많은 공연을 했다. 8년 6개월 동안 군생활을 하다 상사로 제대했다”

- 결혼은 언제 했나?

“군생활을 할 때 나를 죽자 살자 쫒아 다니던 최광철이란 장교(중위)가 한명 있었다. 출신성분도 좋았다.

그와 1988년 결혼을 했다. 물론 남편 집안에서는 반대가 무척 심했다.
덕분에 제대 후에도 계속 평양에 살 수 있었다.
지금 뉴저지에 살고 있는 아들 (최)효성이가 첫 번째 결혼으로 얻은 유일한 자식이다”

- 어쩌다가 국가안전보위부 정보요원 역할을 하게 됐나?

“나는 비록 출신성분이 안 좋았지만 남편 집안이 워낙 토대가 좋아서 북한정권에서 나를 믿은 것 같다.
남편의 작은 아버지(시숙부)는 국가안전보위부 실세였던 제1국 부국장이었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인 1987년부터 1999년 탈북 할 때까지 햇수로 12년 동안 보위부를 위해 일했다”

- 주로 어떤 일을 했나?

“별의 별 일을 다 했다. 주로 중국에서 활동을 많이 했다.
범죄를 저지르고 탈북한 군인들 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해삼, 전복, 골동품 팔아서 사업자금 만들기도 하고,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들 동태 파악도 하고... 보위부가 하달한 명령대로 정말 많은 일을 다 했다.

정보요원 일을 할 당시 내 이름은 마영애가 아니었다. 북한에서는 최광애란 이름을 사용했고, 중국에서는 장혜숙이란 이름을 썼다. 북한 정보요원들은 모두 가명을 사용한다.

정보요원 일을 하다가 명령을 제대로 수행 못하거나 오해를 받아 두 번이나 보위부에 체포돼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보위부에서 일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히거나 탈북자들을 잡아들이는 일은 하지 않은 점을 지금도 다행스럽게 생각 한다”

- 북한에 살았으면 별달리 어려움 없이 잘 살았을 텐데 왜 탈북을 했나?

“이른바 ‘백성룡 사건’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조선족 사업가 백성룡 씨가 북한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다가 떼인 사건이 있었다. 그는 북한과 은성무역합영회사를 운영했지만 북한당국은 백 씨의 투자금을 모두 착복하고는 ‘나 몰라라’했다.

그 돈을 떼어먹은 보위부는 나를 백성룡 씨의 주요 활동지역인 중국 목단강시(市)로 보내 그가 한국 국정원의 자금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다.

그러나 내가 현지에 가보니 백성룡 씨는 8개 기업체를 운영하는 대규모 사업가인데다 국정원의 도움은커녕 국정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2탄에 계속>

뉴욕 <뉴스메이커> 임종규 선임기자  chunjiin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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