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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한인들 <초기이민편> 16회하와이 이민…어떻게 시작됐나?(2)
정리: 주니리 기자 | 승인 2016.06.24 09:22

셔먼호 갖가지 풍문 돌자 한국에 진상 요구

셔먼호사건은 배가 불에 타 침몰되고 승선했던 모든 사람들이 숨진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건은 그때부터 더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출발은 중국의 천진에서 살고 있던 서양사람들이 조선으로 떠난 셔먼호가 소식이 없자 수소문한 데서 비롯됐다. 이들은 마침 강화도에서 돌아온 프랑스함대의 장병들로부터  <평양에서 정체불명의 외국배 한 척이 불타버렸다>는 풍문을 듣게 됐다. 
이 소문을 근거로 북경주재 미국 대리공사 윌리엄스는 청국정부에 조사를 의뢰했고 청나라는 그 뜻을 조선정부에 전했다. 

한국선 “그런 일 없었고 더구나 미국 배는 아니다” 주장

이때 조선정부는 셔먼호를 영국 배로 간주, 그해 11월에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금년 7월에 서양배가 평양에 들어와 조선 장수 한 명을 납치, 구속하고 재화를 토색질하고 총포를 쏘아대다가 모래톱에 걸려 스스로 불타 죽거나 물에 빠진 자들은 자칭 영국인이라고 주장한 토마스와 중국인 이팔행 및 마귀자등이다. 그런 만큼 미국인의 배 한 척이 소실된 적은 없다. 윌리엄스의 서신은 이러한 영국 배의 소실 사건을 잘 못 전해듣고 조회한 것으로서 그 원인을 구명해 보지 못한데 기인했을 것이다.”
이러한 조선 정부의 회답을 받은 미국 관리들은 이같은 조선 정부의 주장을 믿기보다는 오히려 소각 당한 배가 바로 셔먼호라는 심증을 굳히게 했다. 왜냐하면 셔먼호의 조선 항해를 전후해서 행방불명된 영국 선박이 없었고 그 시기나 승선자의 이름으로 보아 거의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美, 셔먼호 행방 알아보기 위해 군함 두차례파견
  

이렇게 되자 미국 측은 같은 해 12월에 해군대령 슈펠트(R. W. Shufeldt)함장이 이끄는 군함 워추세트호를 조선연안에 파견, 셔먼호의 행방을 추적토록 했다. 워추세트호는 며칠동안 셔먼호의 항해해역을 따라 황해도 연안을 돌며 지방관헌들을 만나는 등 조사를 계속했으나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한 채 귀환하고 말았다. 
그 뒤 1년여 경과하는 동안 “셔먼호의 승선자중 몇 명이 아직도 감금당한 채 생존해 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자 미국 측은 다시 북경정부를 통해 조선에 조회하는 한편 이 소문의 진위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직접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그때가 1868년 3월. 페비커 중령을 함장으로한 쉐난도호를 파견, 황해도와 평안도지방의 연해탐색에 나섰으며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이번에는 대동강어귀까지 들어가 삼화, 장기지방의 관헌들을 만나 셔먼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나 한달 여가 계속된 이 수색에서도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조선당국, 미국배 아닌 영국 배로 확신

미국 측의 이같은 노력이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는 당시의 조선 정부가 시끄러운 이 문제에 휘말려드는 것을 극력 피했을뿐 아니라 실제로 미국이 찾고 있는 셔먼호와 대동강에서 소멸된 배와는 무관한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셔먼호는 소유자는 미국인이었으나 배는 영국인이 경영하는 메도우스사 소속이어서 실제로 영국국기를 게양했을 것이고 또  통역을 맡았던 토마스 선교사도 영국인이어서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소개했을 것이며 따라서 평양의 관리들은 그 배가 영국 배였다는데 대해 의심을 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당시 조선정부가 술책으로 이같은 주장을 했다는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국제전쟁으로 번질뻔했던 위험한 고비 넘겨 

셔먼호 사건은 실종된 배 한 척을 애타게 찾아 나선 미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작은 사건이라는 조선정부의 주장이 교차된 양국간의 사건이었으나 사실은 다국간의 전쟁으로까지 번질뻔했던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었다. 
즉 셔먼호가 소실된 뒤 넉달째인 그해 12월15일 버링게임 청나라 주재 미국공사는 시워드 국무장관에게 셔먼호 선원 전원이 피살됐음을 보고한 뒤 영국과 미국 연합원정군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 요구는 워추세트호(함장, 슈펠트)를 파견, 사실조사를 실시키로 함으로써 뒤로 미뤄졌다. 이 조사에서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시워드 국무장관은 다음해인 1867년 3월2일 베르떼미 주미 프랑스 공사에게 미국과 프랑스의 공동원정대를 조선에 파견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프랑스 외무성은 3월29일 시워드의 미국과 프랑스의 공동조치 제의에 반대하는 서신을 발송, 무산되고 말았다. 만일에 미국의 이같은 국제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면 조선은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연합군의 함포 세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란트대통령 조선과 통상조약 체결지시

한편 셔먼호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채 조선과의 접촉이 제자리에서 맴돌자 청국에 거주하거나 또는 청국을 포함해서 동양을 자주 왕래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무엇보다도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어떤 방법으로든지 조선과 수호 통상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같은 그들의 견해는 미국에도 전해져 드디어 미국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조선왕국과 통상교역을 전개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그리하여 1871년 초 그란트 대통령의 이름으로 북경주제 미국공사 로우에게 다음과 같은 원칙아래 실행방법을 위임한다는 지령이 내려졌다. 
 1, 될 수 있는 한 조선왕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라.
 2, 조선정부로부터 앞으로 난파선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확약을 받으라. 
 3, 국기에 대한 모독행위가 아니거든 무력행사는 피하라. 단 화(和), 전(戰) 어느 쪽의 책임이든 로우공사에게 맡긴다. 
이같은 지령을 밭은 로우(Frederick. F. Low)공사는 즉시 미 아시아함대 사령관 해군소장 로저스(Rogers) 및 총영사 세워어드와 회합을 가진 다음 그 자신이 직접 함대와 함께 조선으로 출동하여 담판하기로 하고 그 의사를 우선 청국 정부에 알렸다.

로우공사 조선과 담판하기 위해 출동 

북경정부는 1871년 4월10일 미국공사의 서한을 조선 정부에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66년(병인년)에 미국상선 3척이 연이어 귀국경내에 이르렀던 바 조난한 한 척은 구호를 받았고 다른 한 척은 해를 입어 선원과 선박이 모두 없어졌다. 본관은 따라서 귀국이 아직도 미국의 국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한 척은 구호하고 다른 한 척은 해치는 그러한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본관과 해군제독은 군함을 이끌고 귀국에 가서 앞으로 미국배가 귀국 경내에서 조난할 경우에는 어떻게 법을 만들어 서로 구원하고 화목하게 지낼 것인지 빨리 결정짓고 싶다.>
외교문서라기보다는 협박편지나 다름없는 내용이다. 
이같은 서한에 대해 대원군 이하 정부관리들은 깜짝 놀랐지만 <병인양요>때 프랑스함대도 무찔렀다는 자부심과 함께 양이(洋夷-서양 오랑케)에 대한 적개심이 치열했던 만큼 다시 무력충돌을 각오하고 연해 경비를 엄중히 하는 한편 미국 측의 요구인 수호 통상교섭에 대해서는 북경 정부를 통해 다음과 같은 회답 문을 보내어 이를 거절했다. 
“우리 나라는 3면이 바다인지라 조난하거나 찾아오는 타국 객선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구호, 호송에 힘써왔다. 미국 난파선에 대해서도 전후 3차례에 걸쳐 이러한 조처를 취해 왔는데 귀관이 이제 한번은 구하고 한번은 해를 입힌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 것은 도리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병인년에 평양에서 생긴 사건은 그 선박이 자멸의 길을 취한 것이 명백해서 그때의 정형을 여러번에 걸쳐 자세히 진술하였는데 다시 무슨 변설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조난한 객선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전례와 같이 구호하여 호송할 것이지만 통상 요구에 대해서는 교역할 물자가 없으므로 협상 할 필요조차 없다. 되도록 잘 생각해 의혹을 버리고 서로 편안 무사하기를 원할 뿐이다. 모름지기 헛된 비용을 쓰면서 내선(來鮮)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처럼 양국의 의사가 그 기본에서 어긋나자 미국 측은 더 이상의 교섭을 단념하고 한반도 침입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강화도에 도착한 미군 군함에서 열린 선상 작전회의.

군함 5척등 함대 이끌고 조선으로 항진 

드디어 로우 공사와 로저스 제독은 1871년(고종 8년) 5월8일 함대를 이끌고 상해를 출발, 일본의 나가사키 항을 거쳐 한반도로 향했다. 기함 콜로라도(Colorado)호를 선두로 알래스카(Alaska)호, 베니시아(Benicia)호, 모노카시(Monocacy)호, 팔로스(Palos)호 등의 군함 5척과 대포 80여문 병력 1천2백30명을 갖춘 이 함대는 5월23일 남양부 풍도(楓島)앞 바다에 이르렀다. 
당시의 상황으로 봤을 때 이들 함대는 현재의 항공모함정도의 위력을 가졌을 것이며 따라서 중무장한 이들 함대가 우리 수역에 접근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선정부는 크게 긴장, 우선 解事譯官(해사역관)을 問情官(문정관)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문정관이 3품 이하의 관헌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로우공사나 로저스제독과의 면접을 거절했다. 말하자면 격이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것은 구실에 불과했다. 
 로저스제독은 문정관을 돌려보낸 뒤 소형선박 4척을 띄워 강화해협의 수로측량과 정찰을 하도록 했다. 바야흐로 침공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른 것이다. 수로측량 등을 끝낸 이들 함정들은 강화해협으로 들어서서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으로 향했다. 

조선 포병대 발포로 한미전쟁 발발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일어났다. 
6월 1일, 연안경비를 맡고 있던 조선군 포병대는 그들의 불법통과를 보고 앞뒤 가릴 것 없이 포문을 연 것이다. 예기치 않은 사태에 미국함정들도 포문을 열었지만 해협의 특성상 일단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되돌아선 로저스 제독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이 충돌은 <미국국기에 대한 모독>이라고 규정한 뒤 본격적인 무력행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손돌목 충돌이 있은 다음날 대원군의 명령으로 진무사(鎭撫使) 정기원이 함대를 찾아가서 미국공사에게 <불법으로 조선의 영해를 침범한 행위>에 대한 엄중한 항의를 하는 한편 통상수호 교섭을 일절 거부했다. 이때 미국 측에서는 드류(E. B. Drew)서기관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무단공격의 책임은 귀국의 군, 민의 망동에 있는 것으로 귀국정부의 본의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따라서 속히 조정의 대신을 파견해 상의하기 바라지만 수일 내로 확답이 없으면 우리측은 자유행동을 취해서라도 초지(初志)를 관철할 작정이다.>
이에 대해 진무사가 또다시 반박 문서를 미국함정에 전달하자 격분한 로저스 제독은 사자를 쫓아 보내고 참모회의를 열어 진격작전을 지시하였다. 
  

강화도에 상륙한 미해군들.

함포사격후 강화도 상륙 차례로 점령

그날은 1871년 6월10일이었다. 모노카시함의 엄호포격 아래 킴벌레이 중령이 인솔한 4백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다음날에는 덕진진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강화수로의 중요한 근거지인 광성진에 육박하였다. 당시 광성진에는 어재연이 경군(정부군)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였지만 병력이나 무기, 전술에 있어 당대의 정예를 자랑하는 미군의 상대가 되기는 어려웠다.

무기 없는 조선군 돌, 흙 뿌리며 항전하다 모두 전사 

수륙양면으로 밀려오는 미군의 맹포격속에 조선 군은 처참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조선 군은 매우 용감히 싸웠다. 그들은 성벽에 올라 돌을 던지고 창과 칼로 미군을 상대했으며 그나마도 무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의 병사들은 흙을 쥐어 미군에게 뿌렸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사살 당하는가 하면 바닷물 속으로 떨어져 죽기도 했다. 결국 어재연이하 1백여 명에 달하는 조선 군은 몇 명의 포로를 제외하고는 백병전 끝에 모두 전사했다. 

미군에 잡힌 조선군 포로들.

당시 이 전쟁에 참가했던 해병대 대위 틸톤(McLane Tilton)은 <강화도 참전 보고문>을 작성, 장관에게 보고했는데 그 중에  처참했던 조선군의 항전 실상이 그려져 있다. 
“...... 우리가 깊은 협곡과 아주 가파른 언덕을 내려 갔을 때 상당히 높은 구릉으로부터 조선 군이 아군의 좌익군에게 맹렬한 포격을 가해 왔다. 정상(대모산)에 도착해보니 맞은편 구릉에 조선 수비 병이 보였다. 조선 수비 병은 징갈총 또는 火귀총으로 난사하고 있었는데 나무숲 사이로 그들의 까만 머리가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들이 쏜 총탄 한발이 우리 진지에 떨어 졌으나 아군의 피해는 없었다. 야포로 맞은편 조선진지로 몇 차례 포격을 가하자 조선 수비 병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포병대의 포격은 성채를 적중 강타함으로써 손돌목 돈대 안에 있는 조선 수비 병 40명 내지 50명의 사상자를 냈다. 포격은 4분 정도 계속됐는데 그 동안 조선 진지로부터 <침울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임전태세는 대단히 용감한 것처럼 보였고 조선 수비 병 아무런 두려움 없이 흉장위로 상체를 노출시킨 채 항전하고 있었다. ...... 광성보를 수비하던 조선 수비 병 수명이 흉장위로 올라서서 돌격해 올라오는 미군에게 돌팔매질을 하면서 한동안 <항전의 납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
 미군들은 승전한 뒤 전원 배에 올라 물치도 앞 바다에서 대기 상태로 조선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참패뒤 항복 않고 강경태도 변치 않자 미국 측이 초조 
 
미국함정측은 참패당한 조선 측이 반드시 겁을 먹고 사과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조선 측은 사과는커녕 시종일관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로저스 제독 등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임무는 평화리에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전투까지 했으며 승리를 했는데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전쟁>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아무리 일방적인 승리였다고 하나 이 전투로 미군은 귀중한 병력을 소모했을 뿐 아니라 5척의 함대 중 2척이 여러 번의 격전을 겪은 끝에 수리하지 않고는 더 이상 사용이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들은 일단 후퇴하여 숨도 돌리고 본국정부의 훈령도 받아야 할 형편에 이르게 됐다. 
 그리하여 미국 함대 측은 우선 조선 수역에서 빠져나가기로 결정하고 6월14일 드류 서기관의 이름으로 부평부사 이 기조에게 조회문을 발송, 조선 측이 끝끝내 화목을 배척한 것을 비난하고 나아가 다음이라도 “우리 나라 인민이 귀국 내에서 조난 당할 경우에는 전날 언명한바와 같이 구호하여 호송하기 바란다”고 요청하면서 7월 3일에는 전 함대가 닻을 올리고 중국으로 떠나갔다. 

미 함대 퇴각 조선정부는 의기양양

미국함대의 퇴거 소식이 서울에 알려지자 대원군 이하 정부의 의기는 드높아 졌다. 그리하여 <신미양요>(신미년에 일어난 서양인들의 소란이라는 의미로 바로 미국의 강화도 침공사건 즉 한미전쟁을 말한다. 미국은 당시 이미 이 전쟁을 공식적으로 COREAN-AMERICAN WAR로 표기했었다. 따라서 우리도 한미전쟁으로 표기해야 마땅하다)후에도 세계정세와 군사지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고립돼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보다는 터무니없는 승리감과 서양인 배척을 계속해야한다는 선전을 하기에 바빴다.
한편 미국 측은 이 사건을 <무의미한 승리>로 간주하여 또 다시 침입을 계획하지 않고 거의 불문에 부쳐 기억에서 지워버리고자 했다. 미국정부의 태도도 그러했고 신문 등 미국 언론기관들의 보도도 그러했다.
 80여년 뒤에 일어난 1950년의 6.25전쟁 즉 한국전쟁을 미국인들이 “The Forgotten War”로 부르고 있음을 비교 할 때 한미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1871년의 <한미전쟁(신미양요)>이후 미국 측은 한동안 조선문제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5년 뒤인 1876년 한일 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한일 두나라사이에 외교사절의 왕래가 빈번해졌고 이때부터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조선은 이때부터 서양의 여러 나라에 대한 견해와 태도가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이같은 틈을 감지한 구미각국은 조선에 대해 차츰 적극성을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본의 외교가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성공한 것을 부러워하는 한편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비추어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서전트 의원 한미통상 촉구, 셔먼호 잘못도 시인

특히 미국에서는 1878년 4월8일에 상원 해사분과위원장 아론 서전트 의원(캘리포니아 출신)이 한미 수교를 위한 결의안을 제출, “미국을 대표할 수 있는 위원을 임명하는 동시에 평화로운 수단과 일본정부의 우호적인 지원을 빌어 한미 양국사이에 통상 수호조약을 체결하도록 진력하라”고 당시의 헤이즈 대통령에게 촉구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한미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셔먼호 사건 때 조선인이 취했던 행동은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 충돌의 잘못은 미국 측에 있었다>고 주의를 환기 시켰다. 
이 결의안은 외교위원회로 넘겨져 심의까지 끝냈으나 상원이 곧 휴회에 들어감에 따라 더 이상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그로부터 4년 후에 결실을 본 한미수교 성공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슈펠트 제독.

미국정부, 슈펠트 제독에게 한미수교 지시

실제로 이 결의안이 제출됐던 그 다음해인 1879년(고종 16년) 미국정부는 타이콘데로가호로 세계일주 항해에 오른 슈펠트 제독에게 <가능한 한 조선을 직접 방문하여 수호조약을 체결하도록 힘써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슈펠트 제독은 이미 1866년에 셔먼호의 행방을 찾아 조선의 수역을 다녀간 일이 있었던 만큼 그에게 재교섭을 위임한 것은 미국정부의 신중한 조치였다고 봐야할 것 같다. 
슈펠트는 아프리카를 돌아서 일본의 시모노세키에 기항하였다가 그해 5월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미국정부는 슈펠트의 부산 입항에 앞서 주일공사 빙햄(John A. Bingham)을 통해 일본외상에게 슈펠트 제독이 그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조선정부에 알선하여 달라고 요청해 두었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정부는 대리공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원산과 인천의 개항문제를 교섭 중이었기 때문에 외상이 직접 조선정부에 알선한다는 것은 <일본과 한국 두 나라 사이의 조약 때문에 다소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사절했다. 그 대신 일본정부는 부산주재 일본영사에게 <미국과 일본 양국의 우의를 위하여 슈펠트 제독이 부산에 머무는 동안에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라>는 소개장을 보냈을 뿐이었다.

동래부사, 슈펠트 면담 요구 자체를 거절

슈펠트가 부산항에 입항한 것은 5월4일이었다. 그 다음날 그는 일본영사를 동래부사에게 보내 <미국사절이 온 것은 통상수호 때문>이라고 설명한 뒤 이같은 내용을 담은 문서를 서울의 중앙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동래부사 심동신은 슈펠트를 만나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마디로 이를 거절해 버렸다. 
슈펠트는 할 수 없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빙햄 공사를 내세워 일본외상에게 직접 주선을 의뢰했으며 이에 일본외상은 미국 측의 외교문서에 자신의 의견서를 동봉하여 조선 정부에 발송했다. 
 이 의견서에는 부산에서 있었던 한미간의 접촉과정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수교의사를 설명한 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미국대신이 이번에 요청하는 것은 지난번 요청을 거듭하는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다. ........
지금은 전세계의 정세가 옛날과는 판이하므로 오늘날 쇄국을 고집 하는 것이 좋지 못함은 우리 나라(일본)가 겪어 보아서 잘 알고 있다. 청국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귀국을 위하여 도모하건대 먼 나라를 융숭히 대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고 충실하게 행하고 공도로써 요구하면 외국의 여러 나라로부터 모욕을 막고 자주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사신은 앞으로 60일 동안 시모노세키에서 기다릴 것이다.”

<고려는 우리 국호 아니다> 슈펠트서신 접수마저 기피

일본 외상이 통보한대로 슈펠트 제독은 조선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시모노세키에서 2개월 동안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부산주재 일본영사를 통해 수교를 거부하고 미국 측의 문서는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을 방문하는 편에 원본을 봉함해서 그대로 반환하고 말았다. 
 조선 측은 예조판서 윤자승의 이름으로 된 회답에서 서신을 거부한 표면적 이유로 <국호문제>를 내세웠다. 즉 미국 측 문서의 봉투에 우리나리의 국호를 Corea(고려)라고 썼으니 고려는 옛 왕조의 이름이다. <국호가 다른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고 주장했다.
미국공사는 조선의 예조판서가 그들의 문서를 뜯어보지도 않고 국왕에게 올릴 수 없다면서 그냥 돌려보낸 것은 미국과 일본 두 나라 정부를 무시한 처사라고 크게 분개했다. 이에 따라 미국 측은 문서를 다시 조선정부에 보내려고 했으나 일본외상이 이 요청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슈펠트 제독은 조선에 대한 수교노력을 단념해야만 했다. 
한편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1880년 8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향해 떠났다. 이들은 8월 11일에 일본 동경에 도착한 뒤 9월15일까지 한달 이상을 일본에 머물렀었는데 이기간 동안 일본외상은 두 차례나 김홍집에게 미국과 수교할 것을 제의했다.  
첫 번째는 8월 13일로 김홍집은 일본 외상의 미국과의 수교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했고 두 번째는 귀국 전인 9월7일로 일본외상은 이때 예조판서에게 보내는 대미 수교촉구 서한을 전달, 가져오게 되었다. 이 서한에서 일본외상은 “청국과 러시아의 위기가 절박하여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판에 귀국은 왜 쇄국만을 고집 하느냐”며 미국과의 수교협상을 거듭 권유하고 나섰다. 
이싯점에서 조선의 쇄국정책이 크게 전환되기 시작했다. 

김홍집, 청국 외교관 만나면서 미국인식 바꿔

그것은 일본 때문이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청국 즉 중국의 영향 때문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김 홍집은 일본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청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이 바로 그처럼 줄기차게 막무가내로 고집해왔던 조선정부의 쇄국정책을 걷어내는 단초를 만든 것이다. 
 김홍집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주일 청국공사 何如璋과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었는데 이 회담을 통해서 그는 변화하는 세계와 외교정책면의 실로 많은 그리고 생생한 새로운 지식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또 이때 주일 청국공사관의 직원인 黃遵憲이 작성한 보고문서를 얻었는데 이 문서가 바로 그 유명한 <私擬 朝鮮策略>으로 이 글이 쇄국정책에서 개방으로 가는 길의 이론적 근거를 조선정부에 제공한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한마디로 당시 남하 정책을 펴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조선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속하며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 (親中. 結日. 聯美)”는 주장이었다. 
김홍집은 서울로 돌아온 뒤 고종황제가 참석한 어전회의 귀국보고회에서 <미국은 여러 나라들과 통상 수교하면서 항상 신의를 중히 여기고 있으며 자기나라의 편의만을 도모하지는 않는다고 청국관리들이 말했다>면서 미국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전달했다.

국제정세 보고 어전회의서 친미성향으로 전환 
 
이에 원로 중신들은 김홍집의 상세한 보고와 <조선책략>에  논술된 미국의 성격을 주의 깊게 검토해 나가기 시작했다. <조선책략>은 이미 소개했던 대로 앞으로 조선이 취해야 할 방책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以夷制夷, 즉 오랑캐로 오랑캐를 막는다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평무사하고 영토의 야심이 없고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자이고 타국의 국내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미국과 결탁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미국이 다시 교섭해 온다면 그들을 맞이해 수교를 할 의사표시까지 하게 되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어전중신회의에서 親中聯美에는 찬성하나 結日策은 반대한다는 의견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일본과 결속해야한다는 주장은 일본주재 청국관리의 주장이었으나 한미수교협상의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그들의 상관인 청나라의 이홍장도 이를 반대, 조선과 같은 의견이어서 한미수교협상을 이끌어 가는데 적어도 이점에서는 의기가 투합 됐다.

슈펠트 이홍장과 접촉하면서 한미수교 급진전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측에도 변화가 있었다. 우연한 일이지만 미국 측도 중국과 관련, 조선과의 수교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일본정부의 알선에 희망을 걸고 시모노세키에 머무르고 있던 슈펠트 제독은 우연한 기회에 시모노세키주재 청국영사와 알게 되었다. 이 만남이 계기가 돼서 일본정부를 통한 조선에 대한 교섭이 수포로 돌아가자 슈펠트 제독은 곧 청국측에 알선을 의뢰했다. 물론 중간역할은 청국의 영사였다. 청국영사는 슈펠트가 조선의 개항 및 수교문제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일본에 머물고 있었던 전후사정을 처음부터 北洋大臣 이홍장에게 보고해왔으며 마침내 슈펠트 제독은 이홍장의 초청을 받아 천진으로 가게 됐다. 
이홍장은 이에 앞서 일본의 조선진출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선에 구미 여러 나라와 수교할 것을 권고해 왔고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북양해군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슈펠트 제독을 위해서 한미교섭의 알선을 자청하는 동시에 슈펠트에게서 해상방위의 지식도 얻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드디어 1880년 8월26일, 천진에서 열린 두 사람의 회담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순조롭게 진행됐다. 슈펠트 제독은 이홍장의 자진 알선에 감사의 뜻을 전달한 뒤 세부적인 사항을 이홍장에게 맡긴 뒤 일단 귀국했으며 이홍장은 이때부터 한미교섭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그때까지도 전국의 儒林이 일본사람과 서양사람들은 똑같다(倭 洋은 一體)면서 미국과의 수교를 극력 반대하고 있었다. 상황이 변하지 않자 국왕을 비롯한 집권대신들은 이홍장의 말과 같이 대국(청나라)의 위력을 빌려 미국과의 수교를 추진하되 비밀에 붙이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참의 김윤식을 천진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중국관헌들을 만나 한미수교문제를 협의하도록 했다. 그때가 1881년 12월이었다. 본격적인 협의는 다음해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이때 이홍장은 김윤식이 국왕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가 아님을 지적하고 국가간의 조약체결에는 반드시 전권대신을 보내야 한다면서 이의 파견을 요청하고 나섰다.
조선에서는 김윤식으로부터 <전권대신> 파견요청을 받았으나 국내여건 특히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협상을 추진해야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도 <전권대신> 파견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을 끌고 있었다. 

이ㆍ슈펠트가 조약안 마련, 조선은 서명만

진전이 없자 이홍장은 슈펠트 제독을 한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김윤식에게 슈펠트 제독이 천진을 떠나 조선으로 갈 것임을 가르쳐 주며 조선에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때 영어통역도 파견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청나라의 마건충 등이 미국인과 협상하여 작성한 수교조약을 보여주며 “이것을 가지고 미국사신과 의논하되 사소한 것은 고쳐도 되지만 큰 것은 고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한다면 입이 떡 벌어지는 망발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나라는 그것을 거절할 정도의 국력이나 외교적인 능력과 힘이 없었다. 중국은 우리 나라를 그들의 속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홍장은 한미 수호조약 안에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다는 구절을 넣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실제로 이홍장은 슈펠트와의 회담에서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한미 수호조약에 명문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슈펠트는 이를 반대, 난항을 거듭하기도 했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 조항에 슈펠트 극력 반대

슈펠트가 이를 반대한 것은 당시의 조선 정부를 위한 개인적 또는 정책적인 배려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이홍장의 주장대로 만일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라면 회담자체가 필요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즉 주권도 없는 나라와 수교협상을 벌인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찬성할 수 없는 조건인 셈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조인식을 갖기전 마지막 단계에서 <조선국의 일방적인 조회>로 처리해 마무리 지었다.
한미 수호조약은 한국의 전권대사와 미국 측의 전권대사가 머리를 맞대고 교섭을 벌여 만들어낸 정교한 작품이 아니라 청나라의 이홍장과 미국의 슈펠트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봐도 옳을 것이다. 
 어떻든 미국대신 슈펠트는 예정대로 천진을 떠나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미국군함은 1척이었고 청국 군함은 3척이었다. 청국 사신 마건충과 정여창이 먼저 인천에 도착했고 슈펠트 제독의 군함 스와타라호는 며칠뒤 도착했다. 
조선정부는 전권대신으로 1876년 강화에서 일본과의 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경험이 있는 신헌을 임명하고 부관에는 김홍집, 종사관에 서상우를 각각 임명하였다. 
이들은 5월14일에 우선 청나라 군함으로 마건충 등을 예방하고 이어 미국 군함으로 슈펠트를 방문하여 영접의 예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좌의정 송근수가 대외조약체결 중지를 요청하는 등 당시 조선정부내에 수교에 반대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아 의견통일을 보지 못해 한동안을 주저주저하다가 1주간이 지난 5월20일이 되어서야 인천부 행관에서 청나라사신이 입회한 가운데 한미양국대표가 위임장을 교환하고 정식회담에 들어 갈 수 있었다.

한미 수호조약 드디어 화도진 언덕에서 조인 
 
드디어 5월22일, 虎島앞 바다에 정박해 있는 청국군함과 미국군함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제물포 화도진언덕에 새로 만든 장막에서 전문 14조에 걸쳐 영어와 한문 각 3통으로 작성된 <한미수호조약>이 두 나라 전권대신에 의해 조인되었다. 
조인이 끝나자 미군군함은 21발의 예포를 쏘아 수교를 축하했다. 
슈펠트 제독의 끈질긴 협상 3년여만에, 셔먼호사건 16년만에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최초의 만남이었던 로버츠 특사의 <조선과의 교역 권고안>이 만들어진 지 무려 48년만에 이루어 진 것이었다. 

한미 수호조약 6조에 근거, 하와이 이민 출발
 
조선과 미국과의 만남을 길게 여기까지 써내려 온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한국과 미국의 초기 접촉과정을 알아두는 것이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필자의 판단에 따른 것이며 둘째는 바로 <한미 수호조약> 때문이었다. 이 조약이 있었기에 하와이 이민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이민의 법적 근거가 바로 이 조약인 것이다.  .
한미 수호조약 제6조가 그것인데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 상민중 미국에 가는 자는 해당국 전역에서 대지를 임차할 수 있고 토지를 매수해 주택이나 창고를 건축할 수 있다. 그들은 각종 본업 및 부업에 종사할 수 있고 법률에 의해 금지하는 제품(마약 등)으로 규정되지 않은 일체의 미 가공 및 가공상품을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다. ...... ”
하와이이민의 시작은 하와이 사탕수수 재배업자들의 요청에 의해 당시의 미국공사 알렌이 바로 이 조항을 내세우면서 고종에게 이민을 역설, 설득에 성공했고 고종은 이를 받아 들여 <수민원>을 설립하고 여권을 만들어주는 등 편의를 제공했다. 

 

이 기사는 1977년 당시 라철삼기자(동아방송·KBS)가 초기이민자들의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방송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아메리카의 한인들'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 주니리 기자  chunjiin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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