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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한인들 <초기이민편> 17회하와이... 그 곳의 실정
정리: 주니리 기자 | 승인 2016.07.07 08:35

일할 사람 없어 설탕생산 못할 정도

한편 하와이의 당시 사정은 어떠했는가?
커피의 대 유행과 함께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한 설탕을 생산하기 위한 사탕수수의 재배와 수확은 인력이 부족해서 그 수요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처음에는 하와이 주변의 섬 주민들을 불러들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달픈 재배농사일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되돌아가기 일쑤였다.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을 당시 사탕수수 밭의 작업 모습.

그러자 농장주들은 유럽의 노동자들을 불러 들였다. 그런데 유럽의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하와이의 날씨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미국 본토로 일자리를 옮겼다. 그들이 본토로 일자리를 옮긴 것은 날씨 등의 작업환경도 이유였겠지만 사실은 임금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많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하와이에서 하루 10시간 노동으로 한인들이 받았던 임금은 69센트였다. 그러나 본토의 임금은 같은 조건에서 1달러 25센트에서 2달러로 무려 3배에 이를 정도 였다.

또 한인 1세들의 증언에 따르면 많은 임금을 받은 작업장의 감독들의 대부분이 유럽인이었던 점에서 작업조건도 나쁜데다 저임금으로 혹사당하는 사탕수수밭의 단순노동자로 그들이 남아 있었을 리가 없었다.

유럽 노동자 적응 못하자 중국 노동자 불러들여

이런 이유로 농장주들은 이번에는 중국의 꾸리들을 들여오려는 방안을 생각하게 됐다. 이 계획은 1852년에 실현돼 그해 3백여명의 중국인이 들어왔으며 이때부터 중국인의 숫자는 크게 늘어 1882년도에는 사탕농장의 전체 노동자 1만2백43명중 중국인은 절반에 가까운 5천37명이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중국인들의 유입을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 구성이 단일 종족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경영자 측에 대한 반란 또는 노동조건에 대한 불평을 제기하는 여건이 되기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중국노동자 많아지자 이번엔 일본노동자로 대체

이리하여 이번에는 일본인 노동자를 들여와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인 노동자는 1886년부터 진출하기 시작하여 1890년에는 1만2천6백10명으로, 1896년에는 2만4천4백7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인 이민들이 인천항을 떠났던 1902년에는 사탕수수재배 노동자 총수 4만 2천2백42명 가운데 일본인 노동자가 3만1천29명이나 돼 전체의 73.5%라는 높은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사탕수수재배업자들은 중국인들이 많아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진출을 억제할 필요가 생겼고 그 한 방안으로 한국인 노동자들의 도입을 추진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일인 비율 높아지고 노동쟁의 빈발하자 한국에 눈 돌려

노재연의 <재미한인사략>에 보면 한인들이 한참 들어오기 시작했던 1904년 12월8일, 오하우 섬의 일루아 농장에서 일본인 노동자들이 파업, 소요를 일으키자 호놀룰루에서 많은 경관들이 왔으며 각처에서 일하고 있던 한인 2백50명을 모집하여 응급 조역을 담당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일본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은 오래 전부터 그리고 오래도록 계속됐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농장주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또 다른 제3의 노동력을 찾게 됐으며 그 대상으로 한인노동자가 선정된 것이다.

그럼 과연 어떤 연유로 1백 여년전에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았으며 한인들의 도입을 생각하게 됐을까?

당시 인력 수출할 수 있는 주권국은 한, 중, 일등 몇 안돼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중국과 일본인 노동자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1900년대 초 그 당시에 후진국으로서 식민지가 아닌 주권국가로서 인력을 수출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를 통하여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을 꼽을 정도였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 당시 이미 미국의 회사들이 한국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회사들끼리 한국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을 것이며 이것이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순은 [하와이 유람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사탕 밭을 일구는 노동일 에 종사해 왔는데 그 수효가 점점 늘어 임금이나 종사하는 일에 만족치 못하고 동맹휴업하는 폐가 빈번히 일어나므로 이에 한국민의 온순한 성질과 착실한 성품을 전해 듣고 한국노동자를 고용하기로 결의하니...... 이민모집은 마침 인천항에 거류하고 있는 데슐러씨에게 위탁하고......>.

한국진출 미국기업 많아 정보 얻은 듯

데이빗 W. 데슐러(Deshler)는 1933년 10월에 발행된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동양광산회사(운산금광)의 인천 주재사원(재정책임자)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그는 <동서개발회사>를 만들어 이민 모집을 하기 최소한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근무, 누구보다도 한국과 한국인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으며 하와이 사탕수수 재배업자들에게 충분한 자료를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당시에 한국에는 운산금광 이외에 서울의 전기회사, 경인철도회사, 서울의 상수도회사 등을 미국인 또는 미국인회사들이 개발 또는 운영하고 있어 미국의 업계에서는 이미 한국에 관한 자료가 상당히 마련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비숍이 직접 한국방문 로비 통해 이민주선

하와이 사탕수수 재배업자협회는 데슐러의 주장이나 일반적인 정보만을 토대로 한국인을 모집하지는 않았다. <하와이 유람기>는 협회를 대표하는 비숍(Eben Faxon Bishop)이 직접 한국을 방문, 사정을 확인한 뒤에 한국정부와 이민계약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와이 유람기>의 저자인 현 순은 이민모집을 해온 <동서개발회사>의 사원으로 고용돼  직접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뒤 한인들을 이끌고 하와이에 도착, 그곳에서 통역으로 있었으며 나중에는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5년 뒤 귀국했으며 3년 뒤에 이 책을 펴냈다. (관련내용은 <하와이 유람기를 쓴 독립운동가 현순> 참조) 따라서 그는 비숍을 직접 만났을 가능성이 많으며 아니면 최소한 그의 측근들을 통해 그가 한국을 방문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농장주대표와 알렌, 상항에서 만나 한인이민 협의 주장도

비숍의 한국방문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다. 그들은 당시의 한국 정부기록에 그의 방문을 증명할 만한 기록이 없다고 말한다. 그만한 인물이라면 분명히 어딘가에 그의 방문과 관련한 기록이 있을 터인데 아무런 기록이나 흔적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비숍의 한국방문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들이 있다. 신성려씨는 1979년에 발표한 <하와이 사탕 밭에 세월을 묻고>에서 하와이의 사탕농장주 대표와 알렌 공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다고 밝혔다. 신 여사의 이같은 주장은 최봉윤씨의 저서인 <미국 속의 한국인>과 일치하고 있는데 농장주 대표와 알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노동자를 하와이로 불러들이기 위한 1차 회합을 가진 뒤 이어 호놀룰루에서 현지의 사탕농장주들과 2차 모임을 갖고 이 회합에서 한인 노동자들의 하와이 이민에 대한 구체적인 최종 결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주장은 상당한 타당성을 갖고 있다. 우선 알렌은 휴가나 업무 협의 등의 이유로 적어도 재임기간에 몇 차례 본국에 돌아갔을 것이고 그때 농장주들의 요청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 것이라는 추측은 훨씬 현실성이 있다.

최병윤씨는 비숍이 돈까지 들고 한국을 방문, 이민모집의 터를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1902년 9월 하와이 사탕농장협회는 브루어(Brewer) 회사의 소유자인 비숍에게 2만 5천 달러를 주어 일본으로 파견하여 한인 이민 자들을 모집하라고 했다. 비숍은 주일 미국 영사인 에드윈(Edwin)을 만나 고베에 한인 이민들이 오는데 따른 수송, 의료검사 및 기타문제를 협의했다. 비숍은 데슐러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배를 타고 가서 구체적으로 모집 방안을 짰다”고 기록, 비숍의 한국방문을 확인하고 있다.

비숍이 한국에 왔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미국 쪽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하와이에서 발행됐던 Evening Bulletin지는 한인 이민이 처음으로 도착한 1903년 1월 13일자에서 한인들의 도착 소식을 전하면서 “비숍이 한국을 방문, 한국이민을 추진했다” 고 보도했었다. 또 1903년 5월 하와이에서는 한인 이민과 관련된 소송 사건이 있었다.  F. B. Berger라는 사람이 비숍을 상대로 한 소송이었는데 그는 이 소장에서 “비숍이 농장을 대표해 한국에 가서 불법으로 이민을 모집했다” 고 주장했었다. (자료편 참조)

이같은 증거도 중요하지만 수 천명, 수만 명을 불러 들이게될 고용협약을 현지에 근무하는 그것도 다른 회사에 근무했던 데슐러에게 전권을 맡겼을 리 없다는 논리도 중요하다. 데슐러가 주한 미국공사관의 알렌 공사를 움직여 이민업무를 전담하게 될 수민원을 만들게 했다는 일부의 주장도 탐탁하지가 않다. 그보다는 하와이를 대표하다 싶을 정도로 막강한 실력자인 사탕수수 재배업자 협회의 대표인 비숍이 직접 한국을 방문, 로비활동을 벌였다는 것이 많은 자료와 당시의 정황 그리고 논리적인 면에서도 합당할 것이다. 

결국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은 사탕수수 재배업자협회, 미국정부기관인 공사관, 고종황제의 허가에 따라 만들어진 수민원 그리고 미국 측에서 만든 데슐러의 동서개발회사 등 공식 채널을 통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추진되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풍랑으로 배가 부서져 겨우 목숨을 부지한 4명의 미국인 선원들이 한국 땅을 밟아 처음으로 미국인을 봤던 한국인들, 이번에는 그 한국인 7천여 명이 미국땅 하와이에 발을 디딘 유민(流民)을 시작한 것이다. 

이 기사는 1977년 당시 라철삼기자(동아방송·KBS)가 초기이민자들의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방송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아메리카의 한인들'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 주니리 기자  chunjiin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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