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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한인들 <초기이민편> 18회이민모집 공고
정리: 주니리 기자 | 승인 2016.07.29 08:48

이민을 모집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렸을까 하는 점도 흥미롭다.
현순의 <하와이 유람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 장경화, 안정수, 송언용, 현순(본인)들이 사무를 보면서 하와이의 사정을 방방곡곡에 널리 선전도 하며 각 시, 군과 각 항구에 이민 모집광고를 하였다”

요즘 표현대로라면 전국을 발로 뛰면서 입으로 글로 선전해댔다는 것이다. 이 글중에 항구를 그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부두노동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부두노동자들은 고향을 떠난 떠돌이 날품팔이였기 때문에 손쉬운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하와이 이민의 상당수는 부두노동을 하다 휩쓸려온 사람들이었다.

이민모집을 담당했던 동서개발회사는 이같은 방법이외에 신문에 광고를 냈었다. 광고의 내용은 하와이의 기후와 노동조건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 내용은 과장되고 미화돼서 전해졌다. 그것은 신문의 광고 내용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바뀌어진 것으로 보인다.

모두 한글로 쓴 7개항의 이 광고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대한제국 정부기관인 수민원이 미국정부를 대리하여 광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민모집 공고 원문.

            - 고    시 -

대미국 하와이 정부의 명령을 받아 아래와 같이 공포함.

1, 하와이 군도로 누구든지 일신이나 혹 권속을 데리고 와서 주접 하고자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편리하게 주선함을 공고함.
2, 기후는 온화하여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으므로 각인의 기질에 합당함.
3, 학교 설립 법이 광대하여 모든 섬에 다 학교가 있어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받지 아니함.
4, 농부를 위하여는 매년 어느 절기든지 직업 얻기가 용이한데 신체가 강건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은 여일 하고 장구한 직업을 얻기 더욱 무난하고 법률의 제반 보호를 받게 함.
5, 월급은 미국금전으로 매삭 15원(일본 금화 30원, 대한 돈으로 57원 가랑)씩이요, 일하는 시간은 매일 10시간 동안이요, 일요일은 휴식함.
6, 농부의 유숙하는 집과 나무와 식수와 병을 치료하는 경비는 고용하는 주인이 지급하고 농부에게는 받지 아니함.
7, 대한제국에 이 고시를 공포하는 권을 줌.

호놀룰루

1903년 8월6일
대미국 영지 하와이 이민감독겸
광고대리 사무관, 렌승

(이 광고는 1903년도의 것이지만 1902년도 말의 최초의 광고와 그 내용에서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한인들은 임금님의 생일과 축제일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야외에 모두 모여 경축하는 한편 친목을 도모했다.

하와이 한인 이민은 몇 명이었는가?

하와이에 노동이민으로 들어온 한인들은 몇 명이었는가?
노재연은 호놀룰루 이민국의 자료를 인용, 모두 7천2백26명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년 반사이 7천2백26명 들어와

“1월13일(1903년) 기선 겔릭호가 동양으로부터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는데 제1차 한인 이민 1백1인이 내도한 가운데서 수인은 안질이 있으므로 환송하고(귀국시키고) 기타 93인(부인 유아포함)은 오하우 섬 일루아 농장 목골리아 동리에 가서 주접(住接)하여 사탕수수 배양과 관개 등에 종사하고 그 뒤에 계속하여 1903년 말까지 16차 기선 편에 1천2백33인이 내도 하고 1904년까지 33차 선편에 3천4백34인이 내도 하고 1905년 7월 초순까지 16차 선편에 2천6백59인이 내도 하여 총계 7천2백26인 중에서 환송한 인수 4백79인을 감하고 실수 6천7백47인이 하와이에 상륙하였다.”

김원용은 <재미 한인 50년사>에서 귀국한 사실은 언급을 하지 않은 채 7천2백26명이 입국했으며 이 중에 남자가 6천48명이고 부녀자가 6백37명이며 남녀 미성년자가 5백4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1906년 11월호의 <코리아 리뷰>는 한인 이민자 총 수는 7천3백94명이며 이중에 부녀자가 7백55명, 14세 미만의 아이들이 4백47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와이 한인 이민 90년을 기념하기 위해 현지에서 만들어진 책자인 <그들의 발자취>에는 이보다 더 많은 7천8백43명으로 남자가 6천7백1명 여자가 6백77명 그리고 미성년자가 4백65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최초의 한인 이민이 도착했던 1903년 1월 13일자 이민국 서류를 입수, 1백1인 모두가 탈락자 없이 입국했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신체검사에서 탈락자가 없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입국한 한인의 수는 더 많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이민들 중에 상당수가 입국한 뒤 이민국에서 수일을 대기상태로 있었다는  주장이고 보면 일단 입국시킨 뒤 신체검사를 실시해서 그 결과에 따라 다시 돌려보냈을 가능성도 있다.  

뒤따라 온 사진결혼 신부 1천 여명 넘어

재미 한인 70년사는 이민이 중단된 1905년 7월부터 12월 사이에 부녀자만 1백18명이 미국에 왔는데 이들은 먼저간 남편이 자리를 잡고 불러들인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어 이같은 경우가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사진혼인으로 들어온 여인들이 있다. <재미 한인 50년사>는 1910년 11월부터 1924년 10월까지 사이에 하와이에 들어온 여자가 9백 51명이고 미국 본토에 들어온 여자가 1백15명 그래서 모두 1천66명이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국한 사람도 1천여명이나

그러나 들어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돌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하와이 이민국자료에 따르면  1905년 이후 1916년까지 10여년 사이에 무려 1천2백46명이 본국으로 돌아 간 것으로 돼있다.

이 자료에 대한 의문점도 있다. 첫째는 과연 그들이 귀국할 만한 여비와 기타경비를 갖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의 수입으로는 여비 마련은 고사하고 먹고살기도  어려운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귀국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한국에 없다는 점이다. 몇 개 언론에서 단편적으로 “몸이 아파서” “고향 생각에 못 견디어” 아무개가 왔다더라는 식의 기사 몇 개가 있을 뿐이다.

몇 년 사이에 1천여명 이상이나 되는 하와이의 한인들이 떼지어 들어 왔다면 요즘으로 말하면 최소한 소설 몇 개, 영화 한 두 편 그리고 무수한 단편 또는 수필 등이 쏟아졌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모두 글을 쓸만한 지식인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변에 소설가 또는 수필가가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관심을 가지고 추적해봤을 터인데 아무런 기록이 없다. 심지어 유행가 한 구절도 없다. 기록이 없으면 구전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그것도 찾기 힘들다.

신한민보 논설 통해 귀국포기 촉구

물론 움직일 수 없는 증거도 있다. 하와이이민국 자료에 따르면 이들 한인들은 “동양으로 떠난 자”로 되어 있다. 그 당시 하와이에서 극동지역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떠난 한국인이 있었다면 요즘처럼 “방문”이나 “관광”이었을 리가 없고 따라서 모두 귀국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가하면 <국민회>의 기관지였던 신한민보는 1909년 10월13일자 기사를 통해 귀국자들에게 “제발 가지 마시오”라고 애걸하다시피 만류했고 같은 해 12월1일자에는 논설을 통해 귀국하지 말 것을 거듭 촉구했다. 신한민보에서 귀국문제를 기사와 논설로 취급했다면 커다란 사회문제였을것으로 추정해도 틀린바 는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귀국하는 한인들이 많았고 당시의 미주 한인사회에 그것이 미치는 파장을 고려해 귀국포기를 종용했던 것이다.

이같은 적극적인 만류의 영향인지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사이에 1백여 명에서 3백여 명이나 되던 연간 귀국자 수가 1910년부터 50여명으로 크게 줄어든 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같은 감소는 만류보다는 그해 한일 합병이 이루어져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귀국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쪽이 더 우세 할 것으로 보인다.

원 위치로 돌아가서 과연 몇 명의 한인들이 그 당시에 미국으로 건너왔는가?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과 뒤늦게 가족 상봉한 경우와 사진 결혼으로 들어온 사람 등을 비교할 때 전체적으로 보면 처음에 입국한 7천2백여명에서 커다란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다. 또 철저한 신체검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갔다는 주장이 당시의 하와이 형편과 한국의 상황으로 미루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되돌아 갔다 하더라도 일단 입국한 뒤 최소한 일주일 이상을 머물렀다는 점과 입국한 숫자에 무게를 두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민국 기록을 인용한 <재미 한인 사략>의 주장인 7천2백26명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이 기사는 1977년 당시 라철삼기자(동아방송·KBS)가 초기이민자들의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방송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아메리카의 한인들'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 주니리 기자  chunjiin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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