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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마지막 왕조시대 이승만의 민중운동그는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제임스 한 | 승인 2016.08.12 07:50
정동에 세운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셀러 선교사 동상과 배재학당 모표. 정동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이 도성 안에 들어서면서 생겨났다.. 쇄국을 고수하던 조선이 제국 열강들의 강압에 의해 개항을 하면서부터이다. 1883년 5월 미국 공사관을 시작으로 정동 곳곳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각국 공사관이 차례로 들어섰다. 뒤이어 선교사들이 그 일대에 서양식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세우면서 정동은 외교의 중심이자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퍼져나가는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이승만은 정동궁(貞洞宮)앞 마당 한 가운데 빈통을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군중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 때 저쪽에서 보부상 패거리들이 몰려오자 대부분의 군중들은 도망쳐 버렸다. 그러자 이승만은 남은 군중들이 해산되지 않토록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이 때 가장 열렬한 황제의 지지자인 길영수(吉永洙)가 보부상패의 선두에서 서 있는 것을 본 이승만은 치솟는 분노를 못참고 길영수 앞으로 뛰어가서 그를 미친듯이 걷어차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때 별안간 굳센 팔이 등뒤로부터 이승만의 팔을 꼭 붙잡더니 그의 귀에다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이승만선생 조용히 도망치십시요.”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자신이 보부상들에게 포위되고 있는 형국이었고 동지들은 모두 도망쳐 버리고 없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어떤 영감(靈感)에 사로 잡혔다. 그에게는 이 소리가 영혼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수도 없었다. 주위는 온통 살기 띤 보부상 패거리들뿐이었다.

만일 그 때 이승만이 살기띤 폭도들을 피하여 도망갔다면 그는 그들에게 살해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달아나지 않고 폭도들 한 가운데를 재빠르게 헤치며 빠른걸음으로 배재학당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경운궁 대안문(大安門)앞에 집결한 보부상패. 고종황제와 수구파들이 동원하여 이승만이 이끌고 있는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 시위를 저지시켰다.

당시에는 모든사람들이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한테도 발견되지 않은채 포고들 사이를 무사히 빠져나와 배재학당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보부상들의 계획은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을 자기들 포위망속에 집어 넣고 잡아내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동지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다. 이승만의 가장 친한 학우인 김원근(金瑗根)은 이승만이 길영수에게 잡혀 죽었다고 통곡하고 있다가 정작 이승만이 교문안으로 들어서자 누구보다 더 기뻐하였다.

그날 석간신문도 이승만이 길영수패에게 붙둘려서 난투판에서 살해당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다시 배재학당을 나와 전에 군중대회를 가졌던 종로로 향하였다. 그러자 그를 본 군중들이 그를 뒤따르기 시작하였다. 해는 이미 지고 주위는 어둠이 접어들기 시작할 무렵이다.

이승만이 다시 군중앞에 섯을 때 그가 이승만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맨 앞줄에 서있던 어느 군중이 “이승만이 살아났다”고 외치자 군중들은 그가 얼마나 크게 다쳤는지를 보기 위해서 서로 밀어가며 앞으로 밀어 닥쳤다.

이 날 밤도 그 다음날의 충돌사건으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독립협회 회원의 한 사람인 김덕구(金德九) 가 용산 근처에서 살해 당했다. 그를 위하여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고 수 천의 군중들이 상여뒤를 따랐다.

만장을 앞세운 상여행렬리 장지로 향하는 모습. 상여꾼이 선창으로 상여소리를 하면 나머지 상여꾼들도 그 소리를 받는다. 상여를 뒤따르는 가족친지들은 곡을 하며 장지까지 간다. 곡비는 상여 앞쪽 영여의 앞과 좌우에서 곡을 하며 따라간다.(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황제는 전국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언제나 그랬듯이 적당한 타협으로 소란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황제는 궁전앞 광화문길에 임시회장을 만들고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지도자들을 모이게 하였다.

외국의 여러 대사와 선교사들이 참석한 앞에서 황제는 두 협회의 회장인 윤치호 길영수 두 사람을 어전에 불러들였다 그리고 황제는 정부를 개혁하겠다는 것과 시위대 지도자를 체포하지않겠다는것을 약속하였다. 황제가 초대한 외국대사들과 선교사들은 이 약속의 증인으로 초대했던 것이다.

이날 황제가 제안한 요지는 중추원(中樞院)을 다시 조직하고 그중추원에 입법권을 부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5명의 중추원 회원을 각 단체에서 선출할 것을 제안하였다.
1898년 12월 이승만은 독립협회에서 추천한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윤치호는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하나 같이 다시 한번 실제적인 개혁이 달성되기를 희망하였다.

1890년대 말 고종황제와 신하들이 덕수궁 준명당에서 남긴 기념사진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음모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인들은 맹렬한 공작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으로 망명한 개혁당을 이용해서 윤치호 이승만과 같은 중추원내의 독립협회출신 의원들과 손을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제임스 한  chunjiin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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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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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 2020-11-10 14:38:52

    김구 선생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어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고, 일제에 봉헌한 앞잡이들도 청산이 되었을텐데. 돌아가신 독립인사들이 아직도 이런 글들 보면 눈을 못 감지 싶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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