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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이승만의 유일한 혈육 아들을 잃다이승만의 이혼과 아들의 사별
제임스 한 | 승인 2016.10.02 03:50

이무렵 이승만의 가정사정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16세 때 그 당시 풍습에 따라서 어른 들이 주선하는 대로 동갑인 박춘겸(朴春兼)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사이에 아명(兒名)을 태산(泰山)이라고 부르는 1898년에 태어난 아들 봉수(鳳秀)가 있었다.

박씨부인은 남편이 옥에 갇히고 공판의 소식이 전하여 지자 국왕에게 상소(上疏)를 시도 하기도 하며 열심히 옥바라지를 하였다. 이당시 부부간의 정은 이승만이 옥중에서 지은 다음과 같은 한시에 서 볼 수 있다.

<임 생각>
세월아 이 가을 위해 머물러 다오
짝이른 원앙을 어찌 하자
오이로운 새라 달밤에 자주 놀라고
고향가을 가득실은 먼 기러기
그리울 때는 연꽃따는 노래 부르고 
버들보고 시름한적 몇 번이던고
타향살이 이다지도 초라할 손가
이별이란 인간치곤 못할 일이야

<아내의 원망(규  원)>
그리다 지치고 밤마다 차다
춥고도 지쳤으니 꿈 또한 어렵다
임의 마음 날쳐럼 괴롭다며는
옥창앞 찾아올 꿈이 있으랴

그러나 이러한 부부간의 정도 그의 장기투옥에 이은 기나긴 재외생활 때문에 차차로 멀어져만 갔고 어느덧 일제의 침략과 그들의 사찰은 그의 가정조차 온전하지를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가 워싱턴에서 수학중 박용만이 미국에 데리고 온 봉수가 1906년 2월25일 디프테 리아로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죽은 뒤에는 이미 부부간의 정도 금이 간듯 하였다.   

그 후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승만은 전동(典洞) YMCA에서 일을 보며 침식을 했고 부인 박씨는 홍수돈(現 昌信洞) 에서 그가 옥중에 손수만든 장농 책상같은 물건들에 정을 붙여 혼자 살았다. 이 것은 효심이 지극한 이승만에게 이미 아버지의 눈 밖에 난 아내와 가정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성감옥 수감 시절 이승만(왼쪽에서 셋째)과 아들 봉수(태산), 이승만은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옥중 도서실 과 학교를 열기도 했다. 동료 죄수들이 손에 성경을 들고 있다. 1904년경 출감이 가까운시점

드디어 서슬이 시퍼런 일제의 감시하에서 망명할 기회를 잡게된 이승만은 박씨부인과 서로 헤어지기를 결정하고 친지에게 이혼서류를 맡겨놓고 출국하였다. 이 때 그는 고종 사촌형인  한사건(韓士建)으로부터 당시 돈 100원을 빌어 박씨에 대해 이혼 후 생활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 후 박씨는 개가를 하지 않고 교회의 전도를 하기도 하며 세살난 아이를 양아들로 삼아 은수(恩秀)라 이름지어 함께 살았는데 그는 장성하여 목수가 되었다.

해방 후에 귀국한 이승만은 오랫동안 박씨의 소식을 몰랐다가 뒤늦게 6.25사변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안타까워 하였다.

한편 감옥에는 7명의 독립협회동지가 들어와 있었다. 그 중에는 그의 어릴 때 친구인 신흥우와 나중에 친교가 두터워진 박용만(朴容萬)도 있었다. 노바스코티아에서 갓온 선교사 헤로이드 여사는 감옥으로 신약성서(新約聖書)를 보내주었다. 이 때 그는 손가락을 쓰지 못하였으므로 동료가 책장을 넘겨주면 큰 소리를 내어 성경을 읽었다. 그가 고통없이 손가락을 쓸 정도가된 것은 그로부터 몇년 뒤에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후년에 이르러서도 마음이 흩어지거나 흥분하면 손가락이 아팠을 때의 습성대로 무의식중에 손 끝을 입에대고 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개혁운동 지도자들의 운명을 알게 되었다.

그들 중에서 김옥균(金玉均)은 상해로 망명했으나 그 곳에서 암살되었고 홍영식(洪英植)은 부총리대신이 되었으나 청나라 군졸에게 황제의 면전에서 살해당했다. 그러나 박영효(朴泳孝)와 서광범 (徐光範)은 서재필과 같이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들은 모두 사리사욕이 아닌 개혁운동가로서 일을 하다가 이러한 길을 가게된 것이었다. 이제는 개혁운동의 중요한 지도자로서 이승만 단 하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김간수장과 이차장의 덕분으로 이승만의 감옥생활은 그에게 지적 정신적 성장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책과 잡지를 모아서 감옥문고(監獄文庫)를 만들었다.

이승만은 조그만 영어사전을 가지고 책을 읽고 모든 단어를 암기하며 한시도 책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 특히 잡지속의 좋은 문장을 잘 기억하였다. 친구들은 그가 잡지속의 문장을 한자도 틀리 지 않고 암송하는 것을 보고 그의 놀라운 암기력(暗記力)에 혀를 찼다.

이처럼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그는 영어에 상당히 익숙해졌고 그 것을 생활에 활용하려고 애를 썼다. 아펜셀러와 벙커는 미국의 정기 간행물인 <전망>지와 <독립>지를 매달 보내주었다.

전망의 편집자이던 리만 아보트는 당시 일본의 현대화와 자유주의를 지지하고 찬양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그의 논문에 대해서 혐오감을 품고 있었으나 단편적(斷片的)인 사회적 정치적 조건과 이론에 관해서는 많이 배웠다.

이승만이 갇힌 감옥의 규칙으로 단 하나의 석유등잔 밖에 허용되지 않았고 그 것도 초저녁이면 꺼야했다. 그러나 감방에 기름이 없는 빈통을 놓아 두는 것은 허용을 하였다. 이승만은 초를 준비해 두었다가 밤이되면 살짝 기름 없는 빈 통에 넣어 불을 켜고 드러누워서 책을 읽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신교육 기관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젤러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이 2차 안식년 때 일본에서 찍은 모습으로 그의 마지막 가족사진이다. (자료 소요한 교수 제공)

그러다가 간수가 가까이 오면 동지들이 경고(警告)를 해주어 통의 입구를 벽으로 돌려놓고 불 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했다. 하지만 간수들도 그가 무엇을 하고있는지 알고 있었으나 간수장의 친절로 특별한 주의를 받은적이 없었다.

감방내에서는 필기도구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입되는 염료(染料)로 잉크를 만들고 헌잡지위에 글을 쓰다가 나중에는 속간되어 나오던 <제국신문>에 논설을 썼다. 논설은 익명(匿名)으로 게재(揭載)되었으나 그가 필자라는 것이 점점 알려지게 되었다.

감방안에는 유명한 시인이며 학자인 이요인(李要仁)과 유길준의 동생이며 글재주가 놀라운 유성준(兪星濬)이 있어 세 사람은 종종 시를지어 경쟁을 하곤했다.

당시 신문에 발표돠었던 <사립봉인구면소<紗立逢人舊面疏>는 유명한 시이다.

<옥중의 歲暮>
밤마다 긴긴회포 닭이울도록
이해도 다가니 집이 그리워
사람은 벌레처럼 구멍에 살고
세월은 냇물따라 급히 흐르네
어버이께 설 술한잔 올려 보고파
솜옷 부처준 아내 보고파
헤어보니 이겨울도 열흘 분인데
삼년을 메어둔말 한가롭구나.

유길준이 1883년 7월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조선을 떠나 1885년 12월 귀국할 때까지 여행한 코스.

그 곳에서 유성준은 독립운동의 원칙을 밝히는 책을 쓰라고 이승만을 격려하였다. 지금까지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지도자들이 군중을 계몽(啓蒙)하는 것을 무시하고 운동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유승준은 일본에 망명하고 있는 형님이 언제인가는 정치적 각광 (脚光)을 받고 귀국하여 정권을 쥐게 될 것이고 그 때는 정부의 기금을 사용해서 책을 인쇄할 수 있다고 보증하였다. 그의 격려를 받은 이승만은 독립정신(獨立精神)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쓸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제임스 한  chunjiin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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