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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KOREA의 탄생역사 바로 세우기 (2)
제임스 한 | 승인 2015.10.28 09:03

해사 이원순은 본관이 연안이씨로 1890년 10월8일 서울 출생했다. 아버지는 이명선이며 어머니 는 백씨이다. 배재학당과 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가 하와이 노동자로 이민했다. 이 부분은 소개 안해도 될 부분이지만 이원순누님의 딸이 한국에 꽤 이름이 알려진 이희호이다. 그래서 1962년 조카 이희호와 당시 김대중의 결혼식은 이원순의 체부동 저택에서 치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의 건국과 같은 시기에 열린 런던올림픽 선수단에게 태극기를 하사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태극기를 받고 있는 분이 바로 이원순 선생이다.

미군정시절인 1947년 IOC 총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여기에서 승인을 받지 않는다면 런던올림픽 참가도 무산이 되는 것이었다. 체육인들은 모든 역량을 IOC 총회에 쏟았다. “자네가 한국을 대표해 IOC에 가주시게, 역사적인 일을 맡아줘” 당시 이상백은 한국 사람이 여권을 만들어 해외로 나가는게 쉽지 않다고 판단 KOC대표로 한국인 최초의 ‘KOREA’ 국명의 여권을 만들어 전경무 KOC부위원장을 현지에 파견했다. 전경무 부위원장은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미국 유학생 총회장을 맡는 등 나름 리더십과 언변이 뛰어난 인재였다. 그래서 전경무 부위원장은 민족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IOC 총회가 열리는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향한다.

제14회 런던올림픽선수단 환송식에 나온 서울시민 들의 열화와 같은 모습(왼쪽) 망국38년만에 런던올림픽스타임에 입장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선수단(오른쪽 사진)

당시 서울에서 스톡홀름까지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정이었다. 서울에서 하지 미군정사령관이 내준 미군 군용기를 타고 1947년 5월 29일 많은 이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났다. 그런데 어쩐일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백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 들었다. “군용기가 일본 도쿄 비행장 근처에 있는 산에 충돌했습니다. 탑승자 40명 전원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순간 이상백은 머릿 속이 하얗게 변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전경무의 사망소식이었다. 이상백은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화급히 고인을 대신해 스톡홀름으로 날아 갈 다른 인물을 구해야 했다. 여기 저기 수소문한 끝에 적임자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원순 한인이민위원장이 적당합니다. 빨리 스톡홀름으로 보내야 합니다.”

당시 이원순은 귀국을 늦추고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KOC의 연락을 받고 고민할 틈도 없이 스톡홀름행을 결정한 그는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그러나 그에게도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기록이 부족했다. 당장 여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원순은 자신이 직접 타이핑을 해서 여행증명서를 만들어 거기에 신상과 출입국 기록을 기재한 것이다. 이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급하게 스웨덴 비자를 받은 이원순은 극적으로 IOC 총회가 열리는 스톡홀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IOC 총회에 입장하자 IOC 위원들이 모두 기립하여 그에게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환영합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이 곳에 와 주셔서 너무 감사 합니다” 이날 IOC는 만장일치로 한국의 올림픽 참가를 승인했다. 아직 정부를 수립하지 않은 국가가 극적으로 올림픽 진출을 확정지은 것이다. 당시 이원순이 직접 작성한 여행증명서는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등재했다.

1948년 8월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 한국선수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선수촌에 입장하고 있는 모습. 올림픽 참가 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획득한 김성집 역도선수와 여자 투원반에 참가한 방봉식 선수의 모습,미 군정시절인 1945년 해방의 기쁨속에 열린 국민체육대회에서 태극기를 든 기수 손기정 선수가 입장식을 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그런데 문제는 이 때부터였다. 선수 한 명당 2천 달러 이상 경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나라가 충당하기에는 상당한 액수였다. 심지어는 올림픽 출전을 포기하자는 여론도 나오고 있었다. 이 때 KOC 한 관계자가 아이디어를 냈다. “복권을 발행하는 건 어떨까요?” 그래도 KOC는 복권 발행의 성공은 장담할 수 없었다. 1947년 당시 정부 수립이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복권을 발행하는 일도 쉽지 않았고, 더욱이 생소한 복권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KOC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복권을 발행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복권인 ‘올림픽 후원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들의 선수를, 우리들의 성의로써 보내자”는 게 복권의 취지였다.

당시 복권 한 장은 100원이었다. 쇠고기 한 근이 260원이었던 시절에 이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하지만 복권의 취지를 이해한 국민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무려 120만 장이나 팔려 8만 달러의 수익금이 모였다.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도 직접 복권을 구입했고 전국 각지에서 복권 구입을 위해 줄을 서 있을 정도였다. 국민들에게 당첨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복권을 사면 우리 선수들이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설 수 있다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더욱이 복권 앞면에 민족의 염원을 담아 스톡홀름으로 가던 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전경무 부위원장의 사진이 새겨져 있어 국민들을 감동케 했다.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던 1등 상금 1백만 원에 당첨된 옥천의 한 가난한 농부는 당첨금을 다시 기부해 너무 훈훈한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이건 될성 부른 나라가 분명하다.

국민들의 1백원이 티끌 모아 태산이된 자금으로 대표팀은 올림픽에 갈 경비를 마련한 것이다. 그들이 런던으로 떠나던 날 대대적으로 열린 시민 환송식에는 사상 처음으로 수 십 만 국민들이 운집해 태극기를 흔들었고, 정부수립과 헌법제정으로 정신이 없던 제헌국회도 특별히 선수단에 격려문을 전달했다. 탄생 직전이던 ‘KOREA’였지만 이미 가슴에 ‘KOREA’를 품고 있었다. 당시 박정휘 축구대표팀 감독은 시민 환송식에서 “우리들의 이 억센 발기운으로 마음껏 외국 팀을 꺾고 오겠다”고 했고, 정항범 단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국제무대에 오르게 해준 2천만 동포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다시금 맹세한다. 우리는 우리민족을 더럽히지 않겠다.” 각종 종교 단체에서도 힘을 내라면서 모은 성금을 선수단에 기부했다. 1948년 6월 21일 서울 종로2가 YMCA 회관에 집결한 67명의 선수단은 서울역까지 가두 행진을 하며 역사적인 올림픽 무대 진출을 기념했다. 너 나 없이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착하고 순한 단군의자손들 이었기에 가능했던 아름다운 대한민국 건국 역사의 한 쪽이다.

제임스 한  chunjiin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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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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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echan 2019-12-25 11:07:04

    당첨이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이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라는 사실이 참 감동적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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