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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문재인의 눈물이 연 5·18판도라의 상자-76. 바로 잡아야 할 5·18 기록
김대령 | 승인 2018.01.02 13:01

6. 바로잡아야 할 5.18 기록

정현진 기자의 “올해는 5.18 진상규명 마지막 기회” 제하의 지난 3월 21일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인터뷰 기사에서 김양래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2017년이 광주사태의 진상규명을 마무리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이며, 상당히 중요한 때임을 이런 말로 강조한다:

올해는 조사와 분석을 통해 역사가 새로 쓰여지는 발판이어야 하고, 그래서 중요합니다. 진상규명을 위해 전반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에요. 정부 공식 보고서가 없고, 사실 관계의 일부만 밝힌 것에 불과한 상태에서 사건의 근본에 아직도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정현진 2017).

 그런데 2017년에 광주사태의 진상규명을 마무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이 지난 30여년간 반복적으로 언론에 잘못 보도되어 잘못 알려진 사실관계들을 바로잡는 일일 것이다.

가. 황석영 책의 심각한 오류

5·18기념재단은 금년 2017년 5월 26일에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황석영이 1985년에 출간한 책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장선욱 2017). 그런데 이 책에는 황석영이 북한의 5·18 도서를 그대로 베끼거나 북한세력이 유포한 악성 유언비어를 그대로 실은 것으로 보이는 오류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한가지 예만 들어본다면 상체에 아무런 총상 없이 멀쩡히 살아있는 김영찬 군이 목 관통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황석영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멀쩡한 생존자 김영찬이 광주사태 첫 학생 사망자로 잘못 알려지게 한 황석영의 오류를 그의 5·18 도서 74쪽에서 그대로 인용하면 이러하다:

한 사람이 볏짚단을 가 져와 불을 질러 장갑차를 폭파시켜 버리자고 하면서 짚단에 불을 붙 여 바퀴부분에 던져 넣었다. 별로 효과가 없음을 알고 시 민들은 장갑차의 윗 뚜껑을 열고 그 속으로 집어 넣으려고 시도했으나 열리지 않자 그대로 뚜껑 위에 올려 놓았다. 잠시 후 안에 있던 공수대원 이 뚜껑을 열고 Ml6 총구를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내밀며 뜨거운 듯이 팔을 휘젓고 공중에 두 발을 쏘더니, 이어서 정조준하여 앞에 보이는 학생을 쏘았다. 순간 그 어린 고교생은 픽 쓰러졌고 사람들은 홑어져서 골목에 찰싹 붙었다. 잠시 후 그들은 총을 겨눈 채로 장갑차를 다시 몰고 지나갔고, 쓰러져서 아직 꿈틀거리는 학생을 몇 명의 청년이 일으켜 안고 몇 발짝도 옮기지 않아 그는 숨을 거두었다. Ml6 총탄이 목을 관통했는데 머리가 덜렁거리며 간신히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학생은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이었다 (황석영 1985, 74).

황석영의 위의 단락에서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 김영찬이 장갑차 해커를 열고 불 붙은 집단을 넣어 그 안에 타고 있던 군인들을 태워 죽이려 한 것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다 사실이 아니다. 공수대원들은 장갑차를 탄 적도, 그 사고장소로 간 적도, 장갑차 위에서 학생을 조준하여 Ml6을 쏜 적도 없었다.

그 장갑차는 광주향토사단이 상무대 (현 김대중컨벤션센터가 위치한 지역의 옛 지명) 전투교육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보낸 장갑차였다. 광주사태 당시 문화방송국(MBC) 경비는 31사라고 불리는 광주향토사단 책임이었다. ROTC 장교 한동석 중위가 20명으로 구성된 1개 소대를 인솔하여 문화방송국을 경비하고 있었는데, 정체불명의 난동자들이 선동하는 방송국 방화가 5월 19일 낮에 이미 시작되었다.

갑자기 수천 명의 폭력군중이 몰려와 화염병을 던지며 방화를 시도하였을 때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지쳐 있는 20명의 병력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방송국에서 급히 셔터문을 내렸을 때 소대 병력도 직원들을 따라 안으로 피신하였지만 한 명이 아직 바깥에 있었을 때 셔터문이 닫히는 바람에 폭력군중에게 몰매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상급 부대에 보고되자 장갑차 한 대가 문화방송국 쪽으로 출동하였다가 도중에서 폭력군중에게 에워 쌓인 채 감시경이 파손되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사진 12 ▲ 황석영은 그의 저서 74쪽에서 군인 총에 맞은 적도 없으며, 멀쩡히 살아있는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이 목 관통상으로 비참하게 죽은 것처럼 묘사하는 아주 희한한 소설을 썼다. 더욱이나 희한한 것은 황석영의 이런 희한한 소설이 5·18 역사인 줄로 맹신하는 미개한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향토사단 보병 병력은 시위진압을 한 적도 없고, 공수부대도 아니지만 군경에 대한 적개심이 있는 군중에게는 만만한 공격 대상이었다. 감시경이 깨져 장갑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그 안에 있는 몇 명의 군인들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군중이 해커 위애서 불덩이를 던져 넣어도 피할 곳이 없었다. 바로 그런 약점을 노려 김영찬 군이 불붙은 볏짚단을 해커 아래로 떨어뜨려 군인들이 타 죽게 하려 했던 것이다. 즉 살기를 띤 군중심리에 휩쓸려 군인들을 태워 죽이려는 살인 시도가 있었다.        

살기를 띤 폭력군중심리에 휩쓸렸던 또 한 명의 학생 이름은 군복무를 마친 전남대 학생 위성삼이었다. 위성삼은 자신이 김영찬 군과 함께 장갑차 방화 시도를 했기 때문에 김영찬 군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안다. 위성삼은 황석영의 책 74쪽에는 그 학생이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살아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계엄군들이 밀고들어왔다. 시위대는 동원예식장 앞으로 후퇴했다. 그곳에는 장갑차 한 대가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장갑차 앞부분 양옆에 달린 감시경이 파손되어 있었다. 한 시민이 어디서 구했는지 볏짚단을 가져와 불을 붙여 바퀴부분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나는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장갑차의 어느 부분이 약한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볏짚단을 장갑차 뚜껑에 올려놓자 느닷없이 뚜껑이 열리면서 M16 총구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총구가 불을 뿜었다. 빈 차인 줄 알았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당황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위협사격이라고 생각하고 시민들에게 "공포탄이니 도망가지 말자"고 외쳤다. 그런데 어떤 고등학생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학생의 명찰을 보고 조선대부고 야간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눈깜짝 할 사이 장갑차는 총을 겨눈 채 도망가버렸다. 나는 몇 명의 시민들과 함께 그 학생을 계림파출소 부근까지 옮겨 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다음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 학생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도 죽은 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확인한 바에 의하면 살아있다고 한다 (위성삼 1988b).

위성삼이 이 증언을 하였던 1988년에 김영찬도 같은 증언을 하였다.  황석영은 공수대원이 정조준하여 앞에 보이는 김영찬 학생의 목을 쏘았다고 기록하였으나, 바로 그 군인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려 하였던 위성삼과 김영찬 두 명 모두 공수대원은커녕 군인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다. 단지 그들은 장갑차 뚜껑, 즉 해치 아래 군인들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였을 뿐이요, 불이 활활 타는 볏집단이 장갑차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공중으로 쏘는 한 방의 총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사진 13 ▲ 1988년에 이 증언을 한 위성삼은 1980년 5월 19일 한 명의 간첩 및 김영찬 군과 더불어 불붙은 볏짚단으로 국군 장갑차를 폭파시키려 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이 증언에서 1985년에 출간된 황석영의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는 김영찬 군이 광주사태 사망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엄연히 살아있는 생존자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준다.

김영찬의 증언에서는 “짚단에 불을 붙여 뚜껑을 열려고 하다가 열리지 않자 그냥 뚜껑 위에 올려놓은” 난동자는 김영찬 본인을 포함하여 세 명이다:

가서 보니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중간지역에 장갑차 1대가 보였다. 청년들이 짚단 5개 정도에 불을 붙여서 장갑차 밑에 던졌으나 더 이상 타 들어가지 않자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장갑차 앞에 붙어 있던 밖을 내다보는 유리로 된 장갑차 눈을 깨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깨지질 않아서 옆에 있던 청년이 안 되겠다면서 짚단을 뚜껑을 열고 집어넣어야겠다며 말했고, 나와 그 청년 둘이서 짚단에 불을 붙여 뚜껑을 열려고 하다가 열리지 않자 그냥 뚜껑 위에 올려놓고 동원예식장쪽 인도로 뛰어갔다.
그때 장갑차는 동원예식장 반대편 쪽 도로에 있는 상태였는데, 장갑차 뚜껑이 빼꼼히 열리면서 총대가 보이더니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나는 그때 총소리를 처음 들어봤다. 무서워서 도망가려고 하는데 옆에 어른들이 공포탄이니까 무서워 말라며 그냥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했다 (김영찬 1988).

만약 황석영이 기록한 대로 김영찬 군이 1980년 5월 19일에 머리가  덜렁거리며 간신히 붙어 있는 채로 사망하였다면 1988년에 위의 증언을 한 김영찬은 유령이란 말인가? 

사진 14 ▲ 황석영이 그의 1985년 저서에서 1980년 5월 19일에 사망하였다고 기록한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의 이름은 김영찬이다. 그러나 김영찬은 사망자가 아니라, 생존자라는 사실은 1988년 7월에 채증된 김영찬 본인의 증언에서도 명백히 확인된다.

황석영이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 김영찬이 죽었다고 기록하여 책을 출간한 해는 1985년이요, 위성삼과 김영찬이 김영찬은 살아있음을 증언한 해는 1988년이다. 그런데 왜 이런 잘못된 기록을 수정하지 않는가? 황석영의 책을 영어로 번역한 설갑수는 지금은 5·18기념재단 핵심 관계자로서 황석영 책 영문판을 해외에 보급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 첫 동기는 대원외국어고등학교 재학 시절 황석영의 책에서 이런 내용들을 읽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황석영의 책 내용 중 애매한 국군에 살인 누명을 씌우는 악의적인 내용들은 거짓 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최근에 이정미와 강일원 등 헌법재판소 8인의 판사는 문제의 태블릿PC는 손석희가 조작한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파악할 만한 지적 능력이 결여된 채 대통령 탄핵심판을 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김영삼 정부 시절의 5·18 재판 검사들도 직접 연구하거나 조사하지 않고, 황석영 책이나 월간지의 엉터리 기사들을 참고하여 5·18사건을 구성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진 15 ▲ 지난 2016년 10월 24일에 손석희가 JTBC 뉴스에서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 연서문을 수정한 증거라며 보여준 청와대 문건은 문재인이 2004년 2월 11일 노무현 정부 정무수석이던 시절 작성한 문건이었다. 그럼에도 이정미와 강일원 등 눈뜬 장님들은 전혀 문서가 작성된 날짜조차 확인해 보지 않고 오로지 가짜 뉴스에만 의거하여 대통령을 파면하였다. 이처럼 김영삼 정부 시절의 5·18 재판도 가짜 뉴스와 유언비어 보도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황석영의 책 74쪽 인용구가 계엄군 첫 발포로서 언급되고 있는 오류도 바로 잡혀져야 한다. 발포와 공포는 결코 혼동될 수 없고 엄연히 구분된다. 사람을 산 채로 불고기가 되도록 태워 죽이는 것은 테러이지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중동 ISIS 테러리스트들이 사람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방법이 사람의 살이 불에 그을리면서 고통스럽게 타 죽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동의 그런 잔인한 테러리스트들도 위성삼과 김영찬이 (간첩으로 추정되는) 괴한과 어울려 시도했던 것처럼 사람을 쇠로 만든 독 속에 가두고 태워 죽이지는 않는다. 요즘 이른바 ‘문빠’들이 박찬주 대장의 공관병의 인권에 대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감시경이 깨진 장갑차 안에 갇힌 채 불벼락을 맞고 있었던 광주향토사단 장병들의 인권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소방소도 시민군 혹은 폭력시위대에 점령당해 광주시민들의 재산인 문화방송국에 붙은 불을 끌 사람은 군인들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이라고 아무런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하려고 했다는 말인가?

총만 전쟁무기가 아니라, 화염병 등 장갑차를 폭파하는 무기 역시 무기이다. 도시에는 볏짚단이 없고, 더구나 화재의 위험 때문에 붙 붙은 볏짚단은 없다. 여러 개의 붙 붙은 볏짚단은 장갑차 폭파를 위해서는 화염병보다도 더 강력한 무기이다. 이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기가 아니라, 누군가가 도시 게릴라전을 위해 준비해 온 것이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시위에서 붙 붙은 볏짚단이 필요한 것인지는 5·18측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지금 5·18 단체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런 사건들의 발포명령자를 찾겠다고 하지만 계엄군 발포가 없었는데 어떻게 발포명령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의 경우에도 단 한 발의 공포탄 발사가 있었을 뿐이다. 누구든 장갑차 해치 아래로 계속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그런 극한상황에 처하게 되면 살기 위해서 공포탄을 쏘게 되는 것이요, 1초 차이로 여러 명의 부하들이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공포탄 한 발 발사를 위해 상부에 보고하고 지시 하달을 기다릴 겨를이 있었겠는가?

광주사태에 대하여 전문적 지식이나 연구 없이 엉터리 법리를 만들고 엉터리 기소를 하여 엉터리 판결을 이끌어 냈던 채동욱 검사와 최환 검사 등의 아주 잘못된 법리는 이제 그 유통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광주매일신문의 유대용 기자는 최환이 지금도 전두환 당시 보안 사령관이 발포 명령자였다는 허튼 주장을 하고 있음을 “‘광주사태’ 폄하·폭도 매도 37년째 지속” 제하의 2017년 5월 7일자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한다:

1995년 5·18특별수사본부장을 맡았던 최환 변호사는 지난 1일 광주시청 3층 중회의실에서 특강을 갖고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는 전두환의 주장은 말이 안 되며 통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최 변호사는 “상황상 전두환 말고는 명령할 사람이 없다. 모든 상황이 전두환을 통해 이뤄졌다고 대법원 판결문에 나와 있다”고 설명했다 (유대용 2017).

그러나 만약 최환이 그 장갑차 안의 광주 군인이었다면 장갑차 위의 난동자들이 해치 아래 있는 군인들을 태워죽이려고 계속 불덩이를 떨어뜨리고 있는데 살기 위해서 공포탄을 쏘지 않았겠는가?

군인들은 계속 붙 붙은 볏짚단이 장갑차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단 한 방의 공포탄을 쏘았을 뿐이었다. 황석영이 기록한 것처럼 김영찬의 목을 조준하고 쏘려면 해치 바깥으로 상체를 내밀어야 하는데, 해치가 붙 붙은 볏짚단으로 불덩이일 때 그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군인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단지 총구 끝이 해치 위로 살짝 나온 것과 하늘을 향해서 쏜 한 방의 공포탄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김영찬 군은 그 총에 맞지 않았다. 김 군은 한참 후에, 즉 김 군이 동원예식장 쪽 인도로 뛰어갔으며, 장갑차도 거의 동시에 도망가고 있었을 때 총에 맞았다. 그런데 김 군은 수천, 수 만 명의 시위군중이 몰려 있었던 동원예식장 쪽 인도에서 하복부에 총을 맞았음에도 단 한 명도 총소리를 들은 시민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김 군은 무성총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광주에서 무성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유일한 무장세력은 북한이 파견한 간첩들 뿐이었다.

황석영 책의 또 하나의 오류의 예는 광주경찰과 공수부대를 혼동하는 기록이다. 황석영이 1985년에 출간한 책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12쪽 내용대로라면 무장봉기 주동세력은 11공수여단이 상급 부대에 보고한 전화 내용을 미리 알고 조선대 뒷산 등 퇴로에 시민군 혹은 괴문장단체 저격수들을 매복시켜 두었던 것이 된다:

오전 10시 30분 내무부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남도청으로부터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전화였다. “이제 우리는 철수한다”는 마지막 교신을 보낸 후 전화는 불통되었다.
군 헬리콥터가 도청과 조선대, 전남대 사이를 오가며 도청 지하실에 처박아 두었던 시민들의 시체와 진압 무기, 탄약을 옮기고 도청의 주요 기밀서류 등을 안전 장소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시민들은 더욱 확고하게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황석영 1985, 112).

공수부대는 내무부에 전화를 건 사실이 없는데 황석영이 어떻게 전화 내용을 알았는가? 5월 21일 도청을 사수하던 경찰 병력이 11공수여단 병력보다 몇 배로 더 많았다.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하고, 마실 물도 없으니까 교대 병력이 오지 않는 한 철수해야 하는 것은 광주경찰도 공수부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경찰은 내무부에, 공수부대는 상급부대에 각각 보고한 것인데, 황석영은 광주경찰과 11공수여단을 동일시하는 혼동을 야기하는 문장을 썼던 것이다.

내무부로 전화를 걸어 철수를 통보한 인물은 11공수 3개 대대 대대장 들이 아니라, 안병하 전남 도경국장이었다. 그때는 전경이 경찰 지휘 하에 있었던 시절이었으며, 20일 밤은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도경국장이 직접 현장에서 폭동 진압 지휘를 하였던 것인데, 경찰관 4명이 시위대가 급속도로 돌격 시킨 버스에 깔려 죽었는데도 후송은커녕 자신도 귀가할 수 없었다. 5월 18일부터 4일 째 시위대에 시달린 전경 병력도 전 날 오후는 식사도 하지 못한 채로 전일빌딩과 도청 사이에 갇힌 채로 폭력군중에 밤새도록 포위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자신이 철수를 결정하고, 내무부에 전화로 철수 보고를 하였던 것이다.

광주경찰과 11공수여단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였던 황석영은 경찰헬기와 군 헬기를 동일시하는 오류도 범하였다. 5월 21일 오전 10시 30분경에 도청광장에 착륙한 헬기는 군 헬리콥터가 아니라, 경찰 헬리콥터였으며, 조선대와 전남대 사이를 오간 적이 없으며, 광주사태 최초 희생자들이었던 경찰 4명과 경찰관 중상자들을 후송하고 있었다. 광주소요 주동자들이 도청을 점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광주경찰이 이때 헬기로 도청의 주요 기밀서류들을 안전 장소로 수송하였다. 

같은 책 243쪽에서 황석영은 시민군 간부 박남선과 신만식을 공수대원으로 오기함으로써 시민군의 총기난사 누명을 애매한 공수대원에게 뒤집어 씌운다:

같은 시각, 도청 본관에서는 뒷담을 타고 넘어들어와 시민군의 전열을 교란시킨 공수대원 두 사람이 2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복도에 늘어서서 밖을 향해 사격하던 시민군들 틈에 슬그머니 끼어 들어 정문의 양 옆 담벽 아래 배치되어 있던 시민군들을 쏘았다. 아래쪽에서는 동료 시민군이 자기들을 쏘는 줄 알고 쏘지 말라고 외치면서 쓰러졌다 (황석영 1985, 243).

황석영의 문장에서 5월 27일 새벽 도청 정문의 양 옆 담벽 아래 시민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내용은 사실이고, 시민군들이 복도에 늘어서서 밖을 향해, 즉 도청 정문과 전일빌딩 방향으로 사격하였다는 내용도 사실과 부합한다. 그러나 밖을 향해 사격하던 시민군들 틈에 공수대원 두 사람이 슬그머니 끼어 들었다는 말은 사실과 정반대이다. 그 두 사람은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과 조사부장 신만식이었다.

김대령  chunjiin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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